‹ 목록으로 동생 루트가 다 파멸이라니

1화

창밖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이 아직 옅게 가라앉아 있는 시각, 선우다연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지난밤 몸을 관통해 지나간 낯선 기억의 잔해를 손끝으로 더듬듯 되짚고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전생, 강서은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어느 삶의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병실 천장의 흰빛, 손끝에서 빠져나가던 온기, 그리고 그 온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 화면 속 로딩 문구까지도. '영겁의 새장' — 밤새 몰입했던 그 게임의 제목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다연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으나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또렷해질 뿐이었다. '이건, 내가 알던 세계야.' 확신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순간, 방문 밖에서 시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금발 웨이브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마치 잘 익은 밀밭이 바람에 물결치는 듯했고,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 아래 자리한 붉은 눈동자는 갓 벼려낸 칼끝처럼 차가운 빛을 담고 있었으며, 도자기처럼 흰 피부는 어느 한 점의 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매끄럽게 이어져 있었다. 후작가 장녀이자 이 세계에서는 '악역 영애'로 이름 붙여진 존재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베리아.' 게임 속에서 불리던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명치 끝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이중 루트에 진입하지 않는 이상 평범한 조연으로 지나갔을 그 이름이, 어느 순간부터 광기에 물든 악역으로 전락해 파멸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다연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녀가 아침 인사를 건네며 옷을 정돈해주었고, 다연은 그 손길을 받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선우소이. 자신의 친여동생이자, 그 게임 '영겁의 새장'의 공식 주인공이었다. '영겁의 새장'이라 불리는 이 게임은 여러 남성 공략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결말이 갈라지는 구조를 지녔고, 그중에서도 '이중 루트'라 불리는 특정 분기는 주인공이 두 명의 남자에게 동시에 얽혀 극단적인 감금과 파멸로 치닫는 경로였다. 다연은 소이가 그 이중 루트의 조건을 채우게 되는 순간, 자신이 알던 모든 결말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다는 것을 다연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고, 계단 끝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아챘다. 식당 문을 열자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소이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니,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내려오셨어요?" 밤색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묻는 소이의 옥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었고, 다연은 그 순진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자신이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지도.' 다연은 애써 표정을 다스리며 소이의 옆자리에 앉았고,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오늘의 일정을 캐묻기 시작했다. "오늘 학당 일정이 어떻게 되니. 방과 후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어. 산책은 몇 시에 나갈 예정이고."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지자 소이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오전 수업 끝나고 도서관에 잠깐 들를 것 같고, 산책은 특별히 정한 시간은 없는데……. 언니,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세요?" 되묻는 소이의 목소리에 옅은 불안이 섞여 있었지만, 다연은 그 불안조차 지금은 필요한 경계심이라 여기며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도서관에는 몇 시쯤. 혼자 가는 거니, 아니면 누구와 함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후작 부인이 의아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연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동생을 다그치는 것도 아니고." 부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나무람이 섞여 있었지만 다연은 그 시선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놓치면 안 돼. 이 아이의 동선을, 그 사람들과의 접점을, 전부 알고 있어야 해.'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응접실 쪽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고, 시종이 다급히 들어와 왕세자 전하의 방문을 알렸다. 달칵, 문이 열리고. 금발과 벽안을 가진 청년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들어섰는데, 그 금발은 아침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 눈부셨고, 벽안은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처럼 매끄럽고도 서늘했으며, 그 완벽한 이목구비와 위엄 있는 태도만 보면 누구라도 나라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을 만한 모습이었으나, 다연의 눈에는 그 미소 뒤에 감춰진 것이 먼저 보였다. '이겸.' 이 세계에서 왕세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이중 루트에서는 지위를 이용해 소이를 감금하고 강제로 아내로 삼는다는 사실을 다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 소이의 캐릭터가 갇힌 방 안에서 흘리던 대사가, 문득 귓가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제발… 놓아주세요, 전하……!' 그 애원에 이겸이 웃으며 답했던 대사까지도 선명했다. '놓아주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그 냉소적인 웃음소리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것만 같아서, 다연은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억누르며 자리를 지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이 양." 이겸이 부드럽게 웃으며 소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소이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는데, 그 순간 다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 사이로 팔을 밀어 넣으며 소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듯 잡아챘다. 좌중에는 순식간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고, 이겸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으나 그는 곧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애께서는 여전히 저를 경계하시는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조롱이 섞여 있음을 다연은 즉각 알아챘지만, 지금은 체면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전하께 실례를 범한 것은 사죄드리겠습니다. 다만 제 동생의 손은 함부로 잡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후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겸은 잠시 다연을 응시하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 참, 재미있는 반응이시군요. 소문과는 사뭇 다르십니다." 그 말속에 숨은 가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연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후작가의 장녀가 냉담하고 오만하다는 소문을 몸소 증명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자신이었을 테니, 오늘 이 반응이 그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법도 했다. 그 말을 뒤로하고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응접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고, 다연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소이의 손목을 아직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니… 왜 그러세요? 갑자기 왜……." 놀란 얼굴로 묻는 소이를 향해 다연은 몸을 낮춰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고, 목소리를 낮춰 또렷하게 경고했다. "소이야, 이 저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아버지가 아니야. 네가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야." 그 말을 들은 소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며, 다연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놓게 될지 아직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소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응접실 창밖으로 마차가 멀어지는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다연의 시선은 방금 이겸이 나간 문 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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