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강무영이라고 합니다."
짧고 낮은 인사말이 들려온 순간, 무영은 다연이 다가서는 것을 보고는 눈에 띄게 몸을 굳혔고, 그 뻣뻣해진 어깨선과 살짝 치켜올라간 턱 끝이 다연의 눈에는 오히려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맞아. 이 사람, 여자 앞에서는 항상 이랬어.'
게임 속에서 무영의 서브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다연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무영은 최강의 검술을 지닌 무사이면서도 여성 앞에서만은 얼어붙는 체질을 가진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서은이 처음 그 캐릭터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저 흔한 클리셰라고 치부했지만, 몇 번이고 회차를 반복하며 그의 서브 스토리를 파고들수록 그 어색함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하나의 상처처럼 느껴졌던 것을, 다연은 지금 이 순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겪었다는 어떤 사건 때문이라 짐작만 될 뿐, 게임 내에서도 그 원인이 명확히 밝혀진 적은 없었지만, 그 갭이야말로 플레이어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가장 큰 매력 포인트였다는 것을 다연은 똑똑히 기억했다. 검을 쥔 손은 흔들림이 없고, 눈빛은 상대의 숨소리 하나까지 읽어낼 만큼 날카로웠으나, 여인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그 완벽한 균형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남자. 그 낙차야말로 무영이라는 인물을 게임 속에서 가장 인간적으로, 동시에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요소였다.
"선우다연입니다."
다연이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네자, 무영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고, 그는 내밀어진 손을 차마 잡지 못한 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그 손이, 검을 쥐면 누구보다 안정적이었을 그 손이, 지금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다연은 놓치지 않았고, 그 떨림을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간지럽게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례하겠습니다."
짧게 내뱉은 말과 함께 무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이겸이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이 원래 여성 앞에서는 이렇습니다. 검을 들 때는 누구보다 침착한데 말이지요."
조롱기 섞인 그 말에 무영의 귓가가 살짝 붉어지는 것을 다연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고, 그 반응이 너무나도 게임 속 설정 그대로여서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고 말았다. 이겸의 말투에는 애정이 담겨 있는 것도 같았고, 동시에 오랜 세월 지켜봐 온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익숙한 놀림이기도 했는데, 다연은 그 관계가 게임 속에서도 몇 번이고 언급되었던 두 사람의 우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묘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렇게 서투르고 이렇게…….'
애정이라는 감정이 다시 한번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연은 무영에게 더 다가서고 싶은 마음과, 지금은 소이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이성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손끝이 저절로 움직여 그가 물러선 방향으로 반걸음 다가가려 했지만, 다연은 이내 그 발걸음을 멈춰 세웠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무영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내 편이 되어줄 수도 있어.'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다연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고, 그녀는 무영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겸이 자리를 정리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정중하지만 어딘가 사무적인 그 말투 속에서, 다연은 이겸이 오늘의 방문을 단순한 인사치레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고, 그가 굳이 무영을 동행시킨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 사람도, 서준가의 동태를 살피려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시간도 없이, 두 사람은 이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응접실을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연은, 무영이 문턱을 넘기 직전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 짧은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가슴이 이상하게 뻐근해졌다. 그 눈빛에는 호기심이라 하기엔 너무 진지했고, 경계라 하기엔 너무 따스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는데, 다연은 그것을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어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문이 닫히는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응접실 안에 낮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다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이 떠난 뒤, 다연은 다시 서재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낮 동안 억눌러왔던 최악의 상상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서재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의 끝이 마치 손끝처럼 다연의 발치까지 다가와 있는 것을 보며, 그녀는 문득 오한을 느꼈다.
'만약 소이가 서준의 이중 루트에 진입하면.'
그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연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눈앞에는 게임 속에서 몇 번이고 확인했던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통째로 펼쳐졌다.
별채 깊은 방, 창문이 모두 봉해진 그곳에서 소이는 며칠째 갇힌 채 서준을 제외한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그가 가져다주는 음식만을 받아먹으며 서서히 인형처럼 변해간다. 처음에는 반항하듯 눈빛을 빛내던 소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준의 목소리에만 반응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가 다가오는 발소리만 들려도 안도의 숨을 내쉬는 지경에 이르는 장면을, 다연은 게임 속 텍스트로 몇 번이고 읽어 내렸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별채로 뛰어든 언니, 다연 자신은.
서준의 손에 조용히,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그 시신은 방부 처리를 위한 유리병 속에 담겨 후작가 저택 현관 앞에 '선물'로 놓인다. 그 유리병 안에서도 다연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고, 게임 속 묘사는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는데, 그 평온함이 오히려 더 소름끼치는 결말이었다는 것을 서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임 텍스트 속에서 그 장면을 읽었을 때 서은은 몇 시간이나 화면을 끄지 못했었는데, 지금 그것이 다연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온몸을 관통하듯 스쳐 지나갔다. 화면 속 텍스트일 때는 그저 하나의 서사였고, 잘 만들어진 비극이었을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흐읍……."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두 팔로 몸을 감쌌고,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 올라오는 것 같았고, 그 서늘함은 마치 그날 유리병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려는 듯 집요하게 몸을 파고들었다.
'안 돼.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거야.'
말줄임표조차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다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 다짐과는 별개로 손끝은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고, 다연은 그 떨림이 멈추지 않는 한 이 세계에서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무영이라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방금 전 보았던 그 서툰 시선, 문턱을 넘기 직전 던졌던 그 짧은 뒤돌아봄을 떠올리며, 다연은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그 생각이 얼마나 위태로운 도박인지도 알고 있었다. 서준이라는 존재가 이미 얼마나 깊숙이 소이의 곁으로 다가섰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시간은 결코 다연의 편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창밖에서 낮게 울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