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뜬 순간, 서린은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보다도 천장에 매달린 마도등—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촛불도 전구도 아닌 정체불명의 조명 기구—을 먼저 인식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듯 밀려들어왔다.
설란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몰두했던 연애 어드벤처 게임의 제목이 뇌리에 박히는 동시에, 서린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손목에 얹힌 은빛 팔찌, 그리고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잘 세공된 백금처럼 은은한 광택을 띠고 있었는데…… 이건 내 손이 아니잖아.
잠깐, 잠깐만. 서린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보며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분명 어젯밤—아니, 정확히는 죽기 직전—까지도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이고 손톱 밑에 볼펜 잉크가 껴 있던, 그런 서른네 살 직장인의 손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방금 도자기를 구워낸 듯한 매끄러운 손이었다. 서린은 자신의 뺨을 한 번 세게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서린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겼고, 곧 시녀 하나가 들어와 커튼을 걷으며 "오늘은 입학 첫날이니 서두르셔야 해요" 하고 재촉했다. 입학이라니, 무슨 입학. 서린은 그 말을 곱씹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은발, 보랏빛 눈동자, 세필로 한 올 한 올 그려낸 듯한 이목구비…….
선우서린.
마력 명문가 선우 백작가의 장녀이자, 서린이 전생에 수십 번은 게임 화면으로 마주했던 그 얼굴이었다. 원작 '설란화'의 악역 영애, 재능은 넘치지만 게을러서 마법 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진정한 여주인공 설하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가 결국 마에 잠식되어 죽는 캐릭터. 서린은 거울을 붙잡은 채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좀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서린은 게임을 하던 시절, 이 캐릭터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나는 존재였지. 능력도 있으면서 노력을 안 해서 매번 뒤통수를 맞고, 자존심만 세서 여주인공한테 시비를 걸다가 결국 자멸하는, 그런 전형적인 서브 빌런. 그런데 지금 그 서브 빌런의 몸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니. 인생 참,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구나.
"저,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시녀가 걱정스레 다가왔지만, 서린은 손을 저어 물리며 애써 웃었다. "괘, 괜찮아.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 목소리마저 낯설게 울렸는데, 앳되고 카랑카랑한, 서린이 서른 넘도록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소녀의 음색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이 못 알아듣는다는 게 이렇게 서글픈 일인 줄 몰랐다.
시녀가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며 흥얼거리는 사이, 서린은 재빨리 방 안을 훑어보았다. 고풍스러운 가구들, 벽에 걸린 초상화—어린 서린이 활짝 웃고 있는—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마차.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어서, 이게 게임 속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비현실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서린은 화장대에 놓인 마법학원 입학 안내서를 집어 들고 재빨리 훑었다. 왕립 세인트로엔 마법학원, 입학식 당일…… 그리고 그 안내서 아래에 조그맣게 적힌 날짜를 확인한 순간, 서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게임 본편이 시작되기 딱 한 달 전이었다.
서린은 게임의 스토리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튜토리얼이라는 이름의 초반부는 신입생들이 마법학원에 적응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는데, 그 튜토리얼이 끝나는 즉시—정확히는 첫 시험 결과가 발표되는 그 순간—악역 영애 선우서린은 진주인공 하은에게 밀려 원하던 자리를 빼앗기고, 분노와 좌절 속에서 제 마력을 통제하지 못한 채 마에 잠식되어 숨을 거둔다. 서린은 그 장면을 몇 번이나 스킵 없이 지켜봤던 기억이 있었다. 화면 가득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서린의 몸을 잠식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공략 대상들의 짧은 애도 대사들. "안타까운 일이었지." "그녀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텐데." 그런 무심한 대사들이 흘러가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던, 그런 서브 이벤트였다.
그때는 그냥 클릭 몇 번으로 넘겼던 장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등골이 서늘했다. 내가 그 클릭 몇 번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내가…… 그 서린이라고?" 서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울 속의 낯선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명치를 짓누르며, 손끝부터 어깨까지 서늘한 소름이 번져나갔다.
서른네 해를 살고 야근에 지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열여섯의 몸으로, 그것도 한 달 뒤 죽을 운명이 확정된 캐릭터로 돌아와 있었다는 것. 하다못해 로또라도 맞아서 다시 태어난 거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시한부 삶이 걸린 악역이라니. 신이 있다면 취향이 상당히 고약한 신이었다.
이건 두 번째 삶이 아니라 시한부 삶이었다.
창밖에서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녀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 이제 정말 출발하셔야 해요" 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서린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손가락으로 거울 표면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게 현실이라는 걸 몸으로 되새기듯이.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첫 시험까지 정확히 한 달. 마법 실력을 갈고닦아 원작보다 나은 성적을 내야 하고, 동시에 하은과의 마찰도 피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 마에 잠식되는 결말 자체를 통째로 피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서린은 아주 작게 되뇌었다.
"한 달……"
딱 한 달 안에, 이 죽음을 뒤집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