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 영애 죽음까지 한달이라니

5화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사교장 특유의 화려함 속에서, 서린은 구석 자리에 앉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벽을 따라 늘어선 은쟁반 위에는 처음 보는 모양의 디저트들이 예술 작품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었는데, 서린은 그 화려함 앞에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저 샹들리에 하나 값이면 전세보증금은 거뜬히 나오겠다……. 서른 넘도록 회사 생활을 하며 다져진 습관은 이런 순간에도 어김없이 발동해서, 서린의 눈은 자연스레 화려한 장식의 가격을 어림잡고 있었다. 다과회와는 별개로 마련된 이 저녁 모임은 신입생들 간의 서열을 은근히 확인하는 자리였는데, 몇몇 영애들이 서린을 향해 던지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소곤거리는 소리, 자수 놓인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 흘러나오는 옅은 웃음소리들이 서린의 귓가에 얇게 스며들었다. "선우 영애, 오늘 실습에서 검은 연기만 뿜으셨다면서요?" 한 영애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고, 주변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다른 영애 하나가 거들었다. "저희 오라버니께 들었는데, 교수님께서 한숨을 세 번이나 쉬셨다더라구요." "세 번이나요? 어머, 그 정도면 거의 재난이잖아요."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서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요." "마력은 그렇게 높으신데, 실력이 안 따라오면 참 안타깝죠. 백작가의 명예가 걸린 일인데." 가시가 박힌 말들이 계속 이어지자, 서린은 속으로 셈을 굴렸다. 이 정도 조롱쯤이야 얼마든지 받아넘길 수 있었다. 서른 넘도록 회사에서 온갖 갑질을 견뎌낸 짬이 있는데, 이런 애교 수준의 비아냥이 뭐가 무섭겠는가. 팀장님한테 서류 집어던짐 당해본 사람이 이 정도로 흔들리면 그건 반칙이지, 서린은 속으로 헛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면, 원작 서린의 성격—오만하고 자존심 강한—과 맞물려 감정이 폭주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원작대로였다면 저 영애의 찻잔을 뒤집어엎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그보다 다들 실습 잘하시나 봐요." 서린이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데, 대답 대신 또 다른 영애가 부채 끝으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는 뭐, 검은 연기까지는 안 나왔으니……." 말끝을 흐리는 그 말투에 담긴 조롱이 너무 선명해서, 서린은 잠시 숨을 고르며 천장의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저것 좀 깨뜨려서 시선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다소 위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도윤이 조용히 다가와 서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교하게 빚은 듯 단정한 이목구비에 은은한 촛불빛이 스치니,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상이 자리에 앉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도윤의 담담한 한마디에 영애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고, 부채로 입을 가리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한 도련님도 오셨네요……" 영애 하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흘렸지만, 도윤은 그저 예의 바른 미소만 지어 보이며 서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좀 전까지 소란스럽던 웃음소리가 마치 물을 뿌린 듯 순식간에 잦아들었는데, 서린은 그 극적인 온도 차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 하나 앉았다고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나. "서린 양, 잠시 정원 좀 걸으시겠습니까? 답답하실 것 같아서요." 서린은 그 제안이 자신을 이 자리에서 빼내주려는 배려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 뒤로 영애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별 상관없다는 듯 서린은 옷매를 정돈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정원으로 나오자, 밤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쳤고, 서린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정원에는 낮게 늘어진 등불이 몇 개 걸려 있어, 그 아래로 밤이슬을 머금은 화단의 꽃들이 마치 유화 속 정물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마워요, 도, 도윤 씨." 서린이 조금 더듬거리며 말하자, 도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별말씀을요. 다들 처음엔 저런 식으로 텃세를 부리곤 합니다. 서린 양뿐만이 아니에요." "그, 그래도…… 도윤 씨 덕분에 살았어요. 안 그랬으면 저 계속 검은 연기 얘기 들으면서 웃는 얼굴 유지해야 했을 텐데." 서린이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며 말하자, 도윤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검은 연기라니. 처음 마법을 배울 때는 다들 그런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저도 첫 실습 때는……" 도윤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손에서 불꽃이 아니라 아예 얼음이 튀어나가 옆 사람 옷을 얼려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서린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요? 그, 그럼 도윤 씨도 저랑 별반 다르지 않았네요." "그렇게 봐주신다면 다행이군요." 도윤이 위로하듯 건넨 말에 서린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뭉근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도윤이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백작가에서는 실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뭐라 하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에 서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원작 설정상 선우 백작가는 딸의 재능만 믿고 방치했다는 배경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집안에서 지내본 기억은 없었으니, 서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웃었다. 백작가라니, 나야말로 그 집 문턱도 제대로 못 넘어봤는데 뭘 알겠어요……. "저희 집은…… 별로 신경 안 써요." 그 대답이 어딘가 공허하게 들렸는지, 도윤은 잠시 서린을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잠깐 동안 서린의 얼굴에 머물렀는데, 안개 낀 숲처럼 깊은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이 동정인지 의문인지 서린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시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사교장 건물로 돌아가는 길, 창문 너머로 다시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하은은 여러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어딘가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듯했는데,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창틀 너머 등불에 비쳐 마치 그림 속 인물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서린의 가슴 한구석에서 낯설고 서늘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기……" 서린이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은은 원래 저렇게 인기가 많나요?" 도윤이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답했다. "이번 학기 들어 부쩍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도윤의 말이 거기서 끊겼는데, 그 짧은 침묵이 서린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화선(花仙) 선출이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스치듯 흘러나왔다. 서린은 그 단어를 곱씹으며, 아직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만을 느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은의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멀고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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