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 영애 죽음까지 한달이라니

2화

마차 안에서 서린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왕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게임의 스토리를 필사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는데, 자꾸만 기억이 뒤섞여서 정확한 순서를 짚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회귀 전에 몇 번이나 돌려본 게임인데도 이렇게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걸 보면, 사람 기억이란 게 생각보다 허술한 물건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서린이 죽는 것은 튜토리얼 직후, 첫 시험 결과 발표식에서다. 둘째, 그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는 진주인공 설하은이 서린이 그토록 원하던 '수석 입학생' 자리를 빼앗아가면서다. 원작에서 서린은 마력만 믿고 수업을 등한시하다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최상위권을 유지할 거라 자신하던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세계 소환자 하은에게 자리를 뺏기자 자존심이 무너져 마력을 폭주시켰다는 설정이었다. 그러고는 그 폭주한 마력에 스스로 잡아먹혀 죽는다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서린은 마차 손잡이를 꾹 쥐며 생각했다. 순위 다툼 자체를 놓아버리면 된다. 수석이든 차석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살아간다면, 폭주할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하은과 사이좋게 지내면 원망할 대상조차 없어질 테니, 이건 그야말로 완벽한 생존 전략이었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스스로가 제법 똑똑하게 느껴져서, 서린은 저도 모르게 콧대가 살짝 올라가는 걸 느꼈다. "좋아, 수석 따위는 관심 없다, 하은이랑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마법 수업은……." 서린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규칙을 세우다가, 문득 셈이 하나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 실력이 형편없다는 원작 설정을 그대로 유지하면, 다른 방식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실습 수업에서 실수로 자기 몸에 불을 지르거나, 소환 마법을 잘못 걸어서 괴물을 불러들이는 식으로. 결국 적당히는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서린은 한숨을 내쉬며 안내서를 다시 펼쳤다. 표지에는 '세인트로엔 마법학원 신입생 안내서'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화려함이 지금 서린의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마차가 학원 정문 앞에 멈춰 서자, 서린은 마부의 손을 잡고 내리며 눈앞에 펼쳐진 세인트로엔 마법학원의 위용에 잠시 압도되었다.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정원마다 마법으로 피워낸 꽃들이 계절과 무관하게 흐드러진 풍경은, 그림으로 그려도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소리를 들을 법했다. 저 멀리 보이는 분수에서는 물방울이 허공에 멈춘 채 반짝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법으로 시간을 늦춘 장식인 듯했다. 서린은 속으로 '등록금이 아깝지 않은 풍경이긴 하네'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 등록금을 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백작가라는 사실에 피식 웃었다. 서린은 입학생들 사이에 섞여 본관 계단을 오르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선우 백작가 영애래." "마력이 그렇게 높다며?" "근데 실력은 형편없다던데……" 수군거림이 등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서린은 애써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평가였으니, 새삼스레 상처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저 소문들이 앞으로의 '순위 따위 관심 없다' 전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린은 속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계단 중턱에 이르렀을 때, 서린은 발밑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는데—누군가 밟고 있던 마도서가 미끄러지며 그녀의 발을 낚아챈 것이었다. "어……" 짧은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고, 서린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대로 목이라도 부러지면, 죽음의 시나리오는 예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되는 셈이었다. 하필 첫날부터, 하필 이렇게 어이없는 방식으로. 서린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스쳐 지나갈 만큼 정신이 또렷했는데, 정작 몸은 그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 채 계속 앞으로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등허리를 받쳐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닿았고, 서린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마치 도자기에 유약을 발라 구워낸 듯 매끄러웠고, 짙은 남색 눈동자는 안개가 낀 새벽 숲처럼 고요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세필로 정성껏 그려낸 초상화 같아서, 서린은 순간 계단에서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청년은 서린을 안전하게 세워준 뒤에도 여전히 팔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제야 서린은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놀라서 그런 거겠지, 서린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했지만, 심장은 그 변명을 믿어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 쿵쿵거렸다. "저, 저는……" 서린이 말을 더듬는 사이,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쏠렸다. 누군가는 감탄하는 눈빛으로,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서린을 훑었는데, 서린은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청년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발목이 시큰거려서 제대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다치신 것 같은데, 의무실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서린의 팔을 부축했고, 서린은 발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아서, 서린은 그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정 도련님이잖아." 정 도련님이라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린이 아무리 게임 스토리를 뒤져봐도 그런 이름의 등장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청년은 게임에 등장하지 않는,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사람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서린이 기억하지 못하는 조연 중 하나인 것일까. 하지만 서린은 그 이름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발목의 통증과 낯선 청년의 온기 사이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왔을 무렵, 청년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린을 내려다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린은 그 질문에 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교하게 세워둔 생존 전략들이 머릿속에서 온통 흩어져버린 것 같았고, 오직 그 짙은 남색 눈동자만이 서린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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