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도청당한 악역 영애

1화

졸업식이라고 해서 꽃다발이랑 사진 찍고 눈물 짓는 그런 걸 상상했다면, 나도 그랬다. 어제까지는. 솔직히 말하면 며칠 전부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돌려봤다. 졸업 가운 입고, 학사모 던지고, 부모님이랑 어색하게 사진 몇 장 찍고, 그다음엔 조용히 짐 싸서 영지로 내려가는 것. 딱 그 정도의 그림. 드라마틱할 것도 없는, 지루하고 평범한 엔딩. 청연 왕립학원 대강당, 붉은 융단 위에 서서 나는 방금 들은 말을 세 번쯤 되새겼다. 왕태자 이현과의 혼약 적합성을 재고해야 한다. 이 문장, 누구 입에서 나왔더라. 아, 저기 저 부회장이라는 애. 이름이… 뭐였지.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애 이름이 아니라 저 애가 방금 내 인생 각본에 빨간 줄을 그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서은하 영애께서는 지난 3년간 전하께 단 한 번도 다정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와. 박수까지 나왔다. 이게 무슨 시상식이라도 되는 줄 아나. 시상식이라면 나한테 트로피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3년 연속 최고 냉혈 혼약자상' 뭐 그런 거. 나는 원래 이런 그림을 1년 뒤, 그러니까 정식 파혼 발표 자리에서 조용히 완성할 계획이었다. 각본, 대사, 표정까지 다 짜놨는데 누가 시놉시스를 앞당겨버렸다. 기획 단계부터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내 이름은 서은하. 청하 공작가의 외동딸이고, 전생에는 한국에서 야근하다 죽은 26살 회사원이었다. 죽던 그날도 야근이었다. 억울했다. 지금도 억울하다. 여기 떨어진 지 벌써 십수 년, 지금은 열여섯을 넘어 왕립학원 졸업반 나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놀랍게도—내가 전생에 플레이하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무대였다. 《청연》. 국내 서브컬처 마니아 사이에서 조용히 사랑받던 그 게임. 나는 그 게임을 세 번 완주했다. 세 번 다 다른 남주 루트였고, 세 번 다 새벽 세 시에 눈물 콧물 짜며 엔딩을 봤다. 여주는 평민 출신 마법사 견습생이었고, 남주는 왕태자 이현. 그리고 나, 서은하는 그 게임의 최종 빌런, 혼약자 포지션의 악역이었다. 냉혈하고 오만하고 결국 파국을 맞는—그 서은하. 게임 속 서은하의 결말이 뭐였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여주를 해코지하려다가 마법 폭주로 자멸. 이현은 그 장면에서 딱 한마디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대사 한 줄로 정리되는 인생. 그게 내가 물려받은 배역이었다. 나는 이 역할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걸 택했다. 이현을 파국으로 몰지 않기. 대신 스스로 나쁜 년이 되어서 깔끔하게 걷어차이기. 계획은 완벽했다. 냉정하게, 정 없이, 딱 그가 여주를 만날 시점까지만 버티다가,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 폭주도 없고, 자멸도 없고, 그냥 '성격 안 맞는 혼약자'로 역사에 한 줄 남는 것. 10년 넘게 준비한 각본이었다. 웃지 않는 연습, 다정하게 말 안 하는 연습,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딱딱하게 걷는 연습을 했다. 완벽했다. 완벽했는데. 근데 왜 지금이야. "영애께서는 심지어 전하의 생신 연회에도 늦게 참석하셨고, 지난 무도회에서는 단 한 곡도 함께 추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시켰나 싶을 정도로 줄줄 나온다. 저 부회장, 준비를 대체 얼마나 한 거야. 발표 자료라도 만들었나. 파워포인트 없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원래도 웃지 않는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속으로는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이었지만. '지금 반박하면 오히려 의심받는다. 침묵하면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럼 영애께서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웃기시네. 내가 저 인간을 사랑한 게 벌써 몇 년째인데. 게임 속에서 볼 때부터 좋아했다. 스크린 너머로도 심장이 뛰었다. 그런데 실물로 보니 더 미쳤다. 그 사람 걸을 때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 좋아하는 수준인데, 그 사람이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까지 외우고 있는 수준인데, 그 사람 목소리 톤이 낮아지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수준인데—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매일 밤 이 사람 생각하다 잠들었다. 매일 아침 이 사람 얼굴 한 번 보려고 일찍 일어났다. 다정한 모습을 안 보였다고 했나? 다정하게 대하면 안 되니까 안 보인 거지.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해서 숨긴 거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나는 냉정한 악역 서은하였고, 냉정한 악역은 사랑을 부정해야 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짜여 있었다. 내가 짜놓은. "···그런 질문에 답할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간신히 내뱉은 말이 초라했다. 목소리까지 떨렸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강당 안이 웅웅거렸다. 야유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뒤섞였다. "저것 봐, 저럴 줄 알았어." "불쌍한 전하." "3년 동안 저러셨다잖아." "진짜 얼음 같으시네, 서은하 영애는." 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나는 그 파도 한가운데 서서,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 연기를 계속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아프다. 아픈데 티를 낼 수가 없다. 불쌍한 전하라니. 나는 그 말에 순간 울컥했는데, 그게 슬픔인지 억울함인지도 헷갈렸다.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아무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거고, 심지어 저 사람도 모를 거다. 그게 이 각본의 핵심이었으니까. 완벽하게 숨기는 것. 완벽하게 몰라주게 하는 것.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그게 이렇게 아프지. 저기 단상 위,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이현을 흘긋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뭔가가 오갔다. 뭘까, 저 눈빛은. 화가 난 걸까. 실망한 걸까. 아니면— 설마, 저것도 연기인가. 그도 나처럼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 눈빛이 뭔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냥 다시 앞을 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굳어 있어야 했다. 이 연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십수 년을 버텨온 각본인데, 오늘 이 강당에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강당 저편에서 누군가 또 뭐라고 소리쳤다. 이번엔 못 알아들었다. 귀가 먹먹했다. 예정보다 1년이나 빨리 시작된 이 단죄가, 대체 어디로 흘러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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