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도청당한 악역 영애

2화

졸업식 단죄가 시작된 지 채 오 분도 안 됐는데, 나는 이미 인생 최악의 여론재판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영애께서는 늘 무표정하시죠. 전하와 함께 있을 때조차." "파티에서 웃으신 적을 본 사람이 있나요? 저는 없습니다." "솔직히 전하께서 저런 분과 혼약이시라는 게 늘 이해가 안 갔어요." 한 마디씩,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 파도를 그냥 맞고 있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반박하면 안 됐다. 내 역할은 여기서 조용히 침묵하다가, 나중에 알아서 물러나는 거였으니까. 근데 이건 좀 다르잖아. 지금은 예정에도 없던 공개 처형이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머릿속으로 오늘 일정을 다시 짚어봤다. 졸업식, 축사, 기념 촬영, 그리고 조용히 빠져나와서 마차 타고 집에 가기. 여론재판은 목록에 없었다. 누가 넣은 거야, 대체. "전하께서는 여기 계신 모두가 아시듯 온화하고 다정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 저런 냉혈한 혼약자라니, 저희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누구든 좀 그만하지. 속으로만 소리쳤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표정. 이 무표정 하나 유지하는 데 삼 년을 갈아 넣었더니 이젠 표정 짓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웃긴 건 뭐냐면, 나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전생에서도, 여기 와서 이 캐릭터를 연기하기 전까지도. 전생의 나였다면 이 상황에서 팝콘 씹으면서 구경했을 텐데. 지금은 내가 그 팝콘의 원료가 된 기분이었다. "영애,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부회장이 다시 나를 정면으로 겨눴다. 강당 안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졸업생, 재학생, 심지어 뒤편에 앉은 몇몇 학부모들까지. 저 뒷줄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은 아까부터 부채질을 멈추고 나만 보고 있었다. 부채가 멈추면 안 되는데, 저러다 더워서 쓰러지시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스칠 정도로 정신이 산만했다. 할 말은 있었다. 아주 많았다. 예를 들면, 내가 무표정한 건 표정 관리가 이 세계에서 생존 스킬이었기 때문이라거나, 파티에서 안 웃은 이유는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거나.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없습니다." 간결하게, 차갑게. 완벽한 대본이었다. 대본을 쓴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게 이 상황의 유일한 위로였다. 그 순간 누군가 크게 웃었다. "저러니까 사랑을 안 받는 거지." 왁, 그 말은 좀 아팠다. 진짜로. 나는 순간 손끝이 저릴 정도로 힘을 줬다. 사랑을 안 받는다니, 미친놈아, 나는 사랑을 안 주는 거지 안 받는 게 아니야, 라는 반박은 당연히 못 했다. 대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걸로 대신했다. 나중에 보니까 반달 모양으로 자국이 남아 있더라. 이 정도면 거의 자해에 가까운 인내심 발휘 아닌가. 대강당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다. 이 상황에 계절감을 느낄 여유가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초여름 볕이 이렇게 따가웠나. 아니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자체가 뜨거운 건가. 이대로 정말 파기당하는 건가. 원래 계획대로면 좋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현을 여주에게 보내고, 나는 조용히 지방 영지에 내려가서 텃밭이나 가꾸며 살려고 했으니까. 그게 내 최종 목표였다. 안빈낙도, 자급자족, 소소한 행복. 상상 속에서 나는 벌써 몇 번이나 그 밭에 상추를 심었다. 토마토도 심었고, 옆집 개랑 친해지는 것까지 계획해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이 감정은 절대 안도가 아니었다. 이상하지. 원하던 결말이 코앞에 왔는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 상추밭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건데. 주변을 둘러봤다. 부회장은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몇몇은 이미 다음 소문거리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 사람들한테는 이게 그냥 재밋거리겠지. 졸업식 특별 이벤트, 영애 몰락 편. "전하, 이쯤 이대로 혼약을 유지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진짜 무서워졌다. 만약 이현이 그렇다고, 유지할 필요 없다고 대답하면. 그럼 나는 진짜로 끝나는 거였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혼약 파기, 가문의 몰락, 지방으로의 추방. 그런데 이상하게 그중 어떤 것도 지금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그냥 그가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그 목소리, 그 표정만이 무서웠다. 숨이 턱 막혔다. 이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강당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부채질하던 아주머니도 그제야 부채를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이제 나에게서 그에게로 옮겨갔다. 제발. 나는 속으로 빌었다. 이런 것도 신에게 빌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도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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