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영애,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까요."
이현이 낮게 물었다. 강당 안 시선이 여전히 우리 둘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 시선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뻔뻔했나.
"···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음이 이상했다. 발끝에 감각이 없었다. 심장은 아까부터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그게 방금 벌어진 일 때문인지 아니면 이현의 손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이 상황에 손 온도를 느낄 정신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파혼이 걸린 순간에 손 온도 감상이나 하고 있다니, 나도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구나 싶었다.
강당 뒤편, 잠시 소란이 가라앉은 자리로 물러났다. 부회장을 비롯한 학생들은 여전히 웅성거렸지만, 아까 같은 기세는 확실히 꺾여 있었다. 냉혈한 악역이었던 내가 갑자기 짝사랑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셈이니, 저들도 어리둥절할 만했다. 나조차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실시간으로 정리가 안 되는 판인데.
"전하, 대체 왜 그러셨어요."
작게 물었다. 원망인지 안도인지 나도 몰랐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왜였을까요."
이현이 되물었다. 저 답답한 화법, 오 년 동안 몰랐던 새로운 면모였다. 다섯 살 때부터 봐온 얼굴인데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제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숨겼는데요."
"필사적으로 숨긴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지켜보고 싶었죠."
지켜보고 싶었다니. 이 말투가 뭔가 위험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그 직감을 무시하려 애썼다. 지금 이 남자 눈빛, 사냥감을 정해놓고 느긋하게 거리를 좁히는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문제는 그 사냥감이 나라는 거고.
"국왕 전하와 왕비님께서 보고 계셨어요."
"압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다 말해버리시면 어떡해요."
"그럼 여기서 영애가 정말로 파혼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나요."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건 사실 나도 원했던 결말이었는데. 이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내 최종 목표였는데. 근데 지금 이 순간, 그 목표가 뭐였는지도 헷갈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조용히 파혼당하고 조연으로 퇴장할 계획이었다. 게임 원작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냉혈한 영애, 왕세자를 이용해먹으려던 악녀, 결국 버림받고 몰락하는 전형적인 서브 빌런. 그 결말을 향해서 지난 몇 달간 나름 열심히 밑밥을 깔아왔다. 일부러 냉랭하게 굴고, 일부러 거리를 두고. 그런데 방금 이현이 그걸 전부 뒤집어버렸다. 강당 한복판에서, 국왕과 왕비 앞에서, 사람들 다 보는데.
이건 원작에도 없는 전개였다.
먼 상석 쪽에서 국왕이 뭔가 손짓을 했다. 시종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이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이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가 어쩐지 불길했다.
"국왕 전하께서 잠시 알현실로 오라 하십니다. 영애도 함께."
올 것이 왔다.
"저까지요?"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옆에서 누가 들었으면 웃겼을 거다. 방금 전까지 온갖 애틋한 대사를 주고받던 사람이 갑자기 신입사원처럼 겁먹은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두 분의 혼약 문제니까요."
나는 순간 오싹해졌다. 국왕 앞에서 정식으로 혼약 존폐를 논의한다는 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판단이 안 됐다. 마치 면접 통과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그게 서류 통보인지 최종 불합격 통보인지 모르는 상태랄까. 아무튼 심장 떨리는 건 똑같았다.
게임 원작 지식을 아무리 뒤져봐도, 졸업식 날 이런 식으로 사건이 터지는 루트는 없었다. 분기점도 아니고, 이벤트 씬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날이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외워온 시나리오를 전부 다시 훑었다. 파혼 루트, 냉전 루트, 배드엔딩 세 가지, 그 어디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이건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게임에서라면 세이브 파일 불러와서 다시 시작하면 그만인데, 여긴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여긴 진짜 내 인생이었다.
"저, 전하."
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손끝이 옷깃에 닿는 순간에도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아까 하신 말씀, 그 감정 공명석으로 받은 정보라는 거···. 어디까지 아세요."
이현이 잠깐 멈춰서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웃음이 왜 이렇게 심장 떨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어딘가 협박처럼 느껴졌다.
"어디까지라니요."
"그,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다."
"전부 다요."
너무 태연하게 대답해서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전부 다면 어디까지···"
"작년 여름, 영애가 제 초상화를 몰래 그려놓고 태워버린 것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정말로 숨이 멈췄다.
그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 혼자 방에서, 밤에, 부끄러워서 그린 지 오 분도 안 돼서 태워버린 그림이었다. 심지어 그림도 형편없었다. 코가 이상하게 나와서 다시 그리려다가 그냥 아예 태워버렸던 기억이다. 그 순간의 부끄러움과 좌절감을, 이 남자가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 년 동안 쌓아온 연기, 계획, 거리 두기, 그 모든 게 사실 처음부터 투명한 유리 뒤에서 벌어진 촌극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리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
이현이 웃었다. 처음 본 진짜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예의 바르고 절제된 왕세자의 웃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완전히 손에 넣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자, 가실까요.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이 상황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