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도청당한 악역 영애

4화

웃음이 터진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경악과 웃음이 반쯤 섞인 그런 소리였다. 강당 안 여기저기서 그 소리가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마치 누군가가 스포일러를 먼저 본 관객처럼, 다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당황해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귀, 귀엽다고요? 전하를요?" "저 얼음장 같은 영애가 그런 말을 하셨다고요?"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누군가는 옆 사람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저기, 저 뒤에 있는 자작 영식은 아예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있었다. 이 자리가 대체 뭐라고 그렇게까지 반응하는 건지. 나는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걸 느꼈다. 화끈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이건 뭐,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사우나 안에서 또 열탕에 빠진 느낌이었다.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 인간이, 이 인간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 죽으라고 저러는 건가, 아니면 살리려고 저러는 건가. 도대체 구분이 안 됐다. "전하, 그, 그건 오해십니다. 그건—" "오해가 아니죠." 이현이 태연하게 말을 끊었다. 이 자식, 십 년 치 감정 로그를 다 갖고 있다는 자신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마치 다이어리 어플에 매일 일기 쓰듯이 내 행동을 하나하나 저장해둔 사람 같았다. 소름 끼치게 자세했다. "지난달 봄 축제에서, 은하는 제가 아이들에게 마법 불꽃을 보여주는 걸 보고 세 시간을 그 자리에서 서 있었습니다. 다들 지루하다고 자리를 뜬 뒤에도요." 그, 그건 진짜다. 반박할 수가 없다. 그날 나는 그냥 구경하는 척, 팔짱을 끼고 저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 시간이었다고? 시간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던 모양이다. 마법 불꽃이 하늘 위에서 초록빛으로, 금빛으로 번갈아 피어날 때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나는 그 환호성보다 불꽃을 다루는 이현의 손끝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그게 세 시간이나 됐는지는, 진짜로 몰랐다. "그리고 이번 겨울, 제가 감기로 며칠 수업에 나오지 못했을 때, 은하는 매일 제 방 창문 밖 정원을 서성이며 제가 나오는지 확인했습니다. 하녀들에게는 정원 손질을 확인한다고 하셨지만." "그, 그건—" 말이 안 나왔다. 부정할 말이 없었다. 진짜였으니까. 그 겨울, 나는 진짜로 매일 그 정원을 서성였다.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다. 그가 아플까 봐, 무슨 병이라도 걸릴까 봐, 하지만 문병 갈 명분이 없어서 정원만 뱅뱅 돈 게 사실이었다. 그때는 겨울이라 정원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나는 두꺼운 외투 하나 걸치고 하녀도 없이 혼자 나가서, 창문 커튼이 걷히는지 안 걷히는지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발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하녀장이 나를 발견하고 "아가씨, 정원사가 여기 없는데 뭘 확인하시는 거예요?" 물었을 때, 나는 당황해서 "잡초, 잡초가 있는지" 라고 대답했다. 겨울에 잡초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이현의 입을 통해 다시 들으니 그때의 나 자신이 너무 뻔해서 몸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이런 사람을 여러분은 냉혈하다고 하시는군요." 이현의 목소리가 이번엔 강당 전체를 향했다. 조롱하던 그 얼굴들이 하나둘씩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방금까지 웃던 자작 영식도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옆에 있던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알고 있는 서은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게 냉혈이라면, 세상 절반이 냉혈이겠군요." 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저 인간은 저렇게 멋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대체 몇 번을 연습한 거지, 아니면 즉석에서 나온 건가. 즉석이라면 더 무섭다. 저 정도의 화술을 순간적으로 뽑아내는 인간이 왜 하필 나한테 저러는 걸까. 나는 순간 이 위기가 위기인지 뭔지도 헷갈렸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데, 동시에 어떤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강당 안의 시선, 조롱, 당황, 술렁거림. 그 모든 소음이 잠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확 줄인 것처럼, 세상이 흐릿해지고 이현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남았다. 십 년이다. 십 년 동안 그는 내 진심을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는지도, 얼마나 서툴게 냉정한 척을 했는지도, 다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준 거였다. 아무 말도 없이. 모르는 척, 못 본 척, 눈치 없는 척. 그 모든 척을 다 하면서 십 년을 버틴 거였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냥 모르는 게 편했을 텐데.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그 인간한테는 재미있었던 걸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마음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정작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전, 전하." 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당 안 모두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이번엔 조롱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선이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흥미와 놀라움이 뒤섞인 그런 눈빛들이었다. 몇몇은 진심으로 감동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고, 몇몇은 그냥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관객의 눈빛이었다. 국왕 부부가 앉아 있는 상석 쪽으로 눈을 돌렸다. 왕비님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 손 사이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저건 분명히 웃고 계신 거다. 국왕은 미간을 좁힌 채 이현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저 표정은 뭘까. 흡족함인지, 골치 아픔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이 사태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나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매뉴얼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왕세자가 강당 한복판에서 오 년치 짝사랑을 폭로했을 때 대처법' 같은 거. 없으니까 그냥 몸이 굳은 채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애." 이현이 나를 부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당 전체가 숨을 죽인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더 큰 게 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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