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이라도, 지킬게요

1화

화랑 학원의 아침은 늘 비슷한 냄새로 시작됐다. 젖은 잔디, 마른 잉크, 그리고 누군가의 향수. 오늘은 그 향수가 유난히 진했다. 아마 재스민 향이었을 텐데, 나는 그 향이 누구 것인지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학원 안에서 재스민 향수를 쓰는 귀족 자제가 몇 명이나 되겠어. 뻔했다. 나는 회랑 창가에 서서 하준을 보고 있었다. '또 저러네.' 이하준은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얼굴. 나는 그 낙차를 벌써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가 웃음 뒤에 숨기는 것이 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저 표정이 나올 때마다 뭔가가 어긋나 있었다는 것. 마치 물속에 잠긴 종이처럼, 겉은 멀쩡한데 속은 이미 젖어 무너지고 있는 얼굴. 이하준은 백작가의 외아들이었다.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학원 안에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든 인물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검술도 곧잘 하고, 게다가 얼굴까지 반칙이었다. 신이 뭘 몰아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인간. 나는 그를 열 살 때 처음 만났다. 넘어져서 무릎이 다 까진 채 울고 있던 나에게, 그가 손수건을 내밀며 웃었던 그 순간부터. '그때부터였지. 이 지랄맞은 마음이.' 그 손수건, 아직도 서랍 안에 있다.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서. 누가 보면 미련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뭐가 미련한지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남작가의 딸로 태어난 내가 백작가 아들을 좋아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조차 안 되는 이야기였다. 신분 차이는 둘째치고, 그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으니까. 그 정혼자가 바로 강태민이었다. 후작가의 유일한 상속자, 강태민은 하준을 향해 거의 광적으로 구애했다. 학원 축제에서 공개적으로 꽃을 바치고, 매일 아침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 하준의 부모에게 직접 정혼을 청했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남자 대 남자의 정혼이라 처음엔 말이 많았지만, 후작가의 위세 앞에서 그 말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솔직히 처음 소문이 돌았을 때는 나도 반신반의했다. 후작가 도련님이 뭐가 부족해서,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알겠더라. 태민의 눈빛에는 흔한 계산이란 게 없었다. 진짜였다. 미친 듯이, 진짜였다. 결국 정혼은 성사됐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사흘을 앓았다. 열이 났고, 밥을 못 먹었고,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죽을 떠먹여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어쩌라고. 니 마음이 뭐가 중요한데.' 웃기지도 않지만 정말 그랬다. 내 마음은 이 판에서 아무 힘도 없었다. 남작가 딸이 백작가 아들을 짝사랑한다는 건, 그야말로 웃음거리도 못 되는 감정이었다.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는. 그날 오후, 학원 정문 앞에 마차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태민이 하준을 데리러 온다고 했다. 후작가의 마차는 늘 그렇듯 화려했다. 금박을 입힌 문양, 새하얀 말 네 마리, 마부까지 정갈한 제복을 갖춰 입고. '저건 뭐, 결혼식 행렬이라도 되나.' 나는 회랑 계단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 든 책은 이미 세 장째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눈은 글자를 보는데 머리는 딴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 태민은 마차에서 내려 하준에게 다가갔다. 늘 그랬듯이 과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오늘도 예쁘시네요, 하준 님." 그가 하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준은 옅게 웃으며 손을 슬쩍 빼는 시늉을 했다. "태민, 사람들 보는 데서는 좀……." "보라고 하죠. 제가 좋아서 그런 건데." 태민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늘 확신이 넘쳤다. '저 확신, 조금만 나눠줬으면 좋겠는데.' 주변 학생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몇몇은 부러운 눈빛이었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질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부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지도 않은. '저 자리, 나였으면 좋았을까.' 아니. 그럴 리가. 나였으면 저 손을 잡을 자격조차 없었겠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을 덮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하준이 태민의 마차를 힐끔 쳐다보는 게 보였다. 그 눈빛이 잠깐, 정말 잠깐 흔들렸다. '뭐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다시 봤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아서,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금방 사라졌다. 그때였다. 말들이 갑자기 앞다리를 들며 울부짖었다. 마부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말들은 통제를 벗어난 채 앞으로 튀어나갔다. 히이이잉! 말발굽 소리가 정문 앞 돌바닥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졌다. "태민!" 하준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뛰어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차 한 대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었다. 바퀴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콰지끈! 마차가 뒤집혔다. 태민의 몸이 그 안에서 그대로 튕겨 나왔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태민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것처럼 보였고, 그다음엔 그냥 돌바닥 위로 떨어졌다. 하준이 태민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나도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발이 삐끗해서 무릎이 까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태민은 돌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하얀 셔츠를 적셨다. 그 붉은 색이 셔츠에 스며드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주 선명하게 그 장면을 기억했다. "태민, 태민, 눈 좀 떠봐, 제발……." 하준이 그의 몸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평소의 그 여유롭고 온화한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목소리는 갈라져서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저게, 진짜 하준의 얼굴인가.'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그가 웃지 않는 얼굴을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직감이, 아까부터 봐온 하준의 그 웃지 않는 눈과 겹쳐지며 명확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말이 왜 저렇게 갑자기……" "저주 아니야? 요즘 후작가에 이상한 소문도 있었잖아." "조용히 해, 누가 듣겠어." 누군가가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다른 누군가는 학원 경비병을 부르러 갔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가갈 자격도, 손을 내밀 자격도 없었으니까. 의식을 잃은 태민의 눈이 아주 잠깐 뜨였다. 그리고 그 눈은, 하준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고도 서늘한 눈빛으로.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저건, 강태민의 눈이 아니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확신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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