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도서관 봉사는 생각보다 조용히 흘러갔다.
태민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사고 전에는 그렇게 활달하고 다정했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침묵으로 채웠다.
"이 책들 여기로 옮기면 돼요?"
"네, 저쪽 서가 세 번째 칸에요."
그게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인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책 옮기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가끔 창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전부였다. 어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그 침묵조차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침묵도 쌓이면 뭔가가 되겠지.'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매번 조를 신청했다. 도현은 그걸 두고 "너 이제 아예 도서관 죽순이 됐다"고 놀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죽순이든 뭐든,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사실 처음 며칠은 태민의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가 미묘하게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정리했다. 손끝이 괜히 떨렸다. 그가 컵을 던졌다는 소문을 들은 뒤로는 더더욱.
'설마 나한테 던지겠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무 근거 없는 자기 위안이었지만, 그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나는 처음으로 태민이 웃는 걸 봤다.
정확히는,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나에게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헐. 웃었다. 방금 저거 웃은 거 맞지?'
나는 하마터면 옆에 있던 책을 놓칠 뻔했다.
"이 책, 재밌어요?"
내가 그가 들고 있던 책 표지를 슬쩍 보며 물었다. 낡은 기사 소설이었다. 표지는 색이 다 바래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냥…… 어릴 때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태민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 좀 신기한 듯 책을 내려다봤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 책 표지를 보면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완전히 다 잊은 게 아니라는 거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이건 단서였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단서.
"그럼 이 책, 다 읽고 나면 뭐가 기억날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최대한 가볍게 말을 던졌다. 너무 들뜬 티를 내면 안 됐다. 이 사람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으니까.
태민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경계와 궁금함이 반쯤 섞인 눈이었다.
"당신은…… 왜 자꾸 저한테 신경을 쓰세요? 다른 애들은 저 무서워서 피하던데."
그 질문에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그거야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라고 하면 이상하겠지.'
그렇다고 "그냥 궁금해서요"라고 하기엔 너무 얕은 대답 같았고, "저는 원래 오지랖이 넓어서요"라고 하기엔 너무 없어 보였다.
"그냥, 봉사조가 같으니까요. 그리고 딱히 무섭지도 않고요."
"저 얼마 전에 컵도 던졌다던데."
태민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자기 얘기를 남 얘기처럼 하고 있었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이유는 저도 잘 몰라요. 그 사람 이름만 들으면 그냥…… 속이 뒤집혀서."
하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속이 뒤집힌다니. 단순히 낯설어서 그런 거치곤 너무 강한 반응인데.'
그건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었다.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면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건 보통 무관심이거나 어색함이지, 저렇게 격렬한 거부는 아니어야 했다. 마치 몸이 기억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고. 이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뭐야. 이거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그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준을 변호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저절로 그렇게 됐다.
태민이 그 말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도 그 사람 아는 사이예요?"
"…네, 조금."
태민은 그 대답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잠깐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 스치는 뭔가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었다.
경계였을까. 아니면 의심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그날 이후로, 태민은 아주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딱 필요한 말 이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완전한 침묵보다는 나았다.
"이 서가 순서, 원래 이렇게 이상해요?"
"네? 뭐가요."
"작가 이름 순서가 아니라 출간 연도 순서잖아요. 찾기 불편하게."
"아…… 그건 저도 몰랐네요. 그냥 원래 있던 대로 정리하는 거라."
"이상해요."
그러고는 다시 침묵. 그런데 그 침묵이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편안한 쪽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이거, 진전이라고 봐도 되나?'
나는 혼자 속으로 조그맣게 손뼉을 쳤다.
한편 학원 안에서는 다른 종류의 소음이 커지고 있었다.
"윤서아, 요즘 강태민 도련님이랑 자주 다닌다며?"
"이하준 도련님 좋아한다더니, 결국 정혼자한테 붙는 거야?"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그런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나는 그 말들을 못 들은 척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이가 갈렸다.
'이게 다 하준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뭘 안다고 저렇게 씹어대냐.'
한번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하필 그 무리와 딱 마주쳤다. 다들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가, 내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대놓고 하지, 뭘 저렇게 숨겨서 하냐.'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지만, 뒤통수가 뜨거웠다.
특히 유독 나를 못마땅해하는 무리가 있었다. 태민을 흠모하던 몇몇 귀족가 자제들이었는데, 태민이 하준을 냉대하게 된 이후로 오히려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를 보이면서도, 정작 그에게 다가서는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윤서아 저러다 태민 도련님한테 꼬리 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도현에게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실소가 터졌다.
'꼬리를 치긴, 니들이 뭘 알아.'
차라리 사실을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니들이 좋아하는 그 도련님이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고, 지금 그 관계를 지켜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웃어넘기기에는 상황이 심상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리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아이가, 다가오는 학원 다과회에서 태민을 정면으로 걸고넘어질 거라는 얘기가 돌았다.
하준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들쑤셔서, 태민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심산이라고.
그 소식을 들은 순간,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지금, 겨우 조금씩 말을 트기 시작했는데.'
다과회는 사흘 뒤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태민이 사람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쌓아온 것들이 전부 헛수고가 될 것 같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태민은 원래도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였다. 누가 하준의 이름을 대놓고 꺼내는 순간,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정말로 사람들 앞에서 컵을 던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건 안 돼. 진짜 안 돼.'
나는 도현을 붙잡고 물었다.
"다과회 때, 걔들이 정확히 뭘 하려는 거래?"
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세힌 몰라. 근데 확실한 건, 절대 좋은 쪽으로는 아니라는 거야."
"구체적으로."
"질문 형식으로 몰아붙일 거란 얘기도 있고, 그냥 대놓고 이하준 도련님 이름 꺼내면서 반응 보려고 한단 얘기도 있어. 근데 어느 쪽이든……"
도현이 말끝을 흐렸다.
"태민 도련님한테 좋을 게 없다는 거지."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 저편, 태민이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 위태로워 보였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대로 휘청 넘어질 것처럼.
사흘 뒤, 저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저 뒷모습을 저대로 무너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