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산 제물, 살아남기로 했다

1화

윤 백작가의 대응접실에는 촛불이 유난히 많이 켜져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냉기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듯했다. 윤세아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아버지 윤재원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아야." 백작은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시선은 창밖에 두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한가와의 혼약은…… 없던 일이 되었다." 세아는 순간 숨이 턱 막혔지만, 곧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한 통보는 아니었다. 지난 몇 달 사이 한지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서늘해졌음을, 대신 의붓누이인 윤소라 곁에서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졌음을 세아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소라의 마력이 성녀의 환생이라 불릴 만큼 대단하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한가에서 너 같은……." 백작은 말을 흐리다가 이내 냉정하게 마무리했다. "무능한 딸을 계속 데려갈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무능하다, 라는 말이 가슴 한복판에 화살처럼 박혔지만, 세아는 그 흔한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미 열 살 무렵부터 셀 수 없이 들어온 말이었으니, 이제 와 새삼스레 아플 것도 없었다. 다만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윤소라가 들어왔다. 새하얀 드레스에 은은한 빛을 두른 그녀는 마치 성화 속에서 걸어 나온 성녀 같았고, 그 뒤로는 한지호가 따라 들어왔다. 그는 세아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라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었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소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미안함이라곤 손톱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난 지호 님이랑…… 그, 진심이거든." "진심이라니, 참 편리한 말이구나." 세아는 자조적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겉으로는 그저 옅게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세아." 한지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해는 마. 널 미워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냥…… 소라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는 아름다운 얼굴에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그 표정마저도 어딘가 연기처럼 매끄러웠다. 세아는 대답 대신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은목걸이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그러나 그 손짓을 놓치지 않은 소라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어, 이거 예쁘다. 나 줘."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야." 세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죽은 사람 물건이 뭐 그렇게 중요해." 소라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었고, 세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결국 백작의 매서운 눈짓 한 번에 손을 놓아야 했다. 목걸이가 소라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순간, 세아는 가슴속 무언가가 조용히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백작이 서류 한 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북부 한설 공작령에서 생贄를 요구해 왔다. 마경의 재앙을 억누르는 대가로…… 매해 한 명의 산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마침 이번 차례가 우리 가문이야." 세아는 그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생贄라니. 마경의 냉혹한 공작에게 보내지는 산 제물이라니, 그것은 사실상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마력도 없고, 쓸모도 없는 너라면…… 딱 맞겠지." 백작이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손길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체면도 세우고, 가문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원망은 말아라." 원망은 말라니,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세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 집에서 자신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담담한 결론에 이르렀다. * * * 마차는 사흘 밤낮을 달려 북부의 경계에 다다랐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점점 황량해졌고, 눈이 채 녹지 않은 벌판 너머로 거대한 성벽이 시커먼 그림자처럼 솟아 있었다. 한설 공작성. 세아는 낡은 외투를 여미며 마차에서 내렸는데, 살을 벨 듯한 냉기가 뺨을 스치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성문이 무겁게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세필로 그려낸 초상화처럼 정적이었고, 안개 낀 겨울 숲을 닮은 눈동자는 세아를 보는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이 '빙결 처형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던 그 남자, 강도윤 공작이었다. 그는 세아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올해의 생贄인가?" 그 말투에는 명백한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 세아 역시 그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는데, 소문 속의 흉포한 괴물이 아니라 지나치게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매서운 북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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