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며칠이 지나자 세아는 성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는데, 아침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새소리와 창을 두드리는 옅은 눈발 소리,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까지도 이제는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었던 것은 강도윤과 식사 시간이 겹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낮과 밤이 어긋난다던 그의 말대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저녁 식사 자리에 종종 나타났고, 그것도 마치 우연을 가장한 듯 어색한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다.
"오늘도 오시네요." 세아가 수프를 뜨며 슬쩍 말을 건넸다.
"성 안의 규칙을 세운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안 되지 않나." 강도윤이 심드렁하게 답했지만, 세아는 그 말이 어딘가 변명처럼 들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지난 며칠간 그가 세운 규칙이란 게 대체 몇 개나 어겨진 것인지, 세아는 속으로 헤아려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답을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식탁 위에는 이제 익힌 고기와 덜 익힌 고기가 나란히 놓였고, 세아는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매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이곤 했다. 가끔은 그가 자신의 접시를 힐끔거리며 반응을 살피는 듯한 시선을 느꼈는데, 그럴 때마다 세아는 일부러 더 맛있게 먹는 척을 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를 향한 작은 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날 저녁, 서재에서 낮 동안 읽을 책을 고르던 세아는 높은 서가 위쪽에 놓인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가죽 표지가 세월에 닳아 반들거리는 그 책은 어쩐지 유독 눈에 밟혔고, 세아는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어보았지만 조금 모자랐다. 서재 안을 둘러보니 마침 낮은 의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세아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끌어와 올라섰다. 발밑이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끝이 책등에 닿는 순간 의자가 삐끗 기울며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 어어……."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붙잡았다. 강도윤이었다. 그는 서재에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급히 다가온 모양이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세아는 그가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위험하게 뭘 하는 거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닿자, 세아는 심장이 크게 한 번 뛰는 것을 느꼈다. 은발이 눈앞에서 흔들리고, 안개 낀 숲 같은 눈동자가 지척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세아는 순간 엉뚱한 생각을 했다. 세필로 그려낸 듯한 콧날과 다물린 입술의 선이 지나치게 정교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그, 죄송합니다." 세아가 얼른 몸을 떼려 했지만, 그의 팔이 잠시 더 머물러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이 세아에게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두 사람 주위에서만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강도윤도 뒤늦게 자신이 그녀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황급히 손을 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귓불이 어느새 옅게 붉어져 있었지만, 세아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신 세아는 자신의 손에 여전히 들려 있는 낡은 책을 내려다보며, 이걸 꺼내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다음엔 하녀를 불러라." 그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네, 네……." 세아 역시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이 이상하게 어색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 그 책은 강도윤이 대신 꺼내주었는데, 그는 의자 없이도 서가 맨 위칸에 손이 닿았고, 세아는 그 키 차이에 또 한 번 묘한 기분을 느꼈다.
"고, 고맙습니다." 세아가 책을 받아들며 중얼거리자, 강도윤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서재를 나섰다. 그 뒷모습이 왠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사라졌다고, 세아는 생각했다.
그 뒤로 며칠간 세아는 강도윤과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별것 아닌 스침에도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고, 그가 무심코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하루 종일 곱씹게 되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소금을 건네주는 손짓 하나에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인사 하나에도 세아는 자꾸 의미를 찾으려 했고, 그런 자신이 우스워 몰래 고개를 젓기도 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기가 두려워, 세아는 그저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었다.
한편 강도윤 역시 평소와 다른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밤에만 활동하던 습관을 어느새 조금씩 미루고 있었고, 서재에서 책을 읽는 세아의 옆모습을 괜히 오래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는 것을.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가끔 흥미로운 대목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 그런 사소한 것들에 자꾸 귀가 기울여진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 싫은 듯, 애써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 노력이 매번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님, 세아 님이랑 되게 가까워지신 것 같아요." 어느 날 리나가 슬쩍 운을 떠보자, 강도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답했다.
"생贄를 돌보는 것은 내 의무다."
"의무 치고는 표정이 되게 편안해 보이시는데요." 리나가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강도윤의 손끝이 서류 위에서 순간 멈췄다.
"……할 말이 없으면 나가봐라."
"제 말이 맞나 봐요. 얼굴 빨개지신 거 보니." 리나가 놓치지 않고 덧붙이자, 강도윤은 대답 대신 서류를 조금 더 세게 넘겼다. 종잇장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리나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으며 방을 나섰고, 강도윤은 홀로 남은 서재에서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잦아든 정원 위로, 세아가 설표와 함께 노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눈밭 위에서 설표가 세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뛰노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정갈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이런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그 역시 세아처럼 이름 붙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한 풍경 저편, 성문 밖 언덕길에서는 낯익은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그 마차는, 세아가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이들의 것이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 마차의 바퀴 소리가, 아직은 성안 어디에도 닿지 않았지만, 곧 이 평화로운 나날에 균열을 낼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