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산 제물, 살아남기로 했다

5화

겨울 해가 짧아지기 시작한 어느 오후, 세아는 정원에서 설표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 위로 설표가 폭신한 발자국을 남기며 뛰어다녔고, 세아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몇 달째, 처음엔 그저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이 성이 어느새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볼을 스치는 겨울바람도, 발밑에서 뽀득거리는 눈 소리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세아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오후도 있구나…….' 세아는 속으로 생각하며 설표의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그 순간 성문 쪽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손이 멈칫, 굳어버렸다. "여기가 그 유명한 한설 공작성이라는 거지?" 익숙한, 그러나 결코 반갑지 않은 음성이었다. 세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화려한 로브를 걸친 한지호와, 그의 팔에 다정하게 매달린 윤소라가 서 있었다. 겨울 햇살 아래 반짝이는 지호의 로브는 이 북부의 삭막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화사했고, 소라의 얼굴에는 여행의 피로 대신 흥미로움만이 가득했다. "언니, 오랜만이야!" 소라가 손을 흔들며 웃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반가움이라기보다는 짙은 조롱이 배어 있었다. "살아있었네? 신기하다, 진짜." "너, 너희가…… 여기 왜?" 세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겨울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세아 자신도 구분할 수 없었다. "북부 국경 시찰 겸, 궁금해서 와봤지. 우리 예비 신부의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한지호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운 여유가, 세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얄밉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저 웃음 하나에도 위축되어 고개를 숙이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저 낯설고 거북하게만 느껴진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는 소라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은목걸이. 어머니의 유품이 소라의 팔찌 장식으로 개조되어 걸려 있었다.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은빛이, 세아의 눈에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혀들었다. "그, 그건……." 세아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이거? 아, 촌스러워서 좀 손봤어." 소라가 아무렇지 않게 팔찌를 매만지며 웃었다. "장인한테 맡겨서 세공비만 얼만데. 어차피 죽은 사람 물건인데, 이렇게 쓰는 게 더 낫지 않아? 그냥 서랍 속에 처박아 두는 것보단." 세아는 그 말에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목걸이는 세아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유일하게 챙겨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물건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저런 손목에 걸려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이제 보니 여긴 생각보다 살 만한가 보네." 한지호가 성벽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시선에는 계산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마치 이 성이 얼마짜리인지 가늠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생贄로 보냈는데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세아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뒤에서 낮고 서늘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내 성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들이 누구지."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강도윤이 은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성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 표정에는 이제까지 세아가 본 적 없는 서늘한 냉기가 어려 있었다. 마치 세필로 그린 조각상처럼 고요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성문 앞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듯했다. 한지호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예의를 갖춘 척 허리를 숙였다. "공작 각하, 저는 한가의 한지호라 합니다. 이쪽은 제 약혼녀인 윤소라이고요." "약혼녀라." 강도윤이 그 단어를 곱씹듯 되풀이하며, 세아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그 짧은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세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세아의 심장이 이유 없이 쿵, 하고 뛰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저희는 그저 예전 인연이 있는 세아를 보러 온 것뿐입니다." 소라가 애교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강도윤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예전 인연이라…….생贄로 보낸 것이 그 인연이라는 뜻인가."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깔리자, 주변의 공기마저 서늘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조차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한지호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운 웃음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그, 그것이…… 저희 가문의 전통이라……." 한지호가 뭔가 변명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강도윤의 눈빛 한 번에 그 말은 목구멍 안으로 다시 삼켜지고 말았다. 세아는 그 순간 강도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축시켰던 이들 앞에서, 처음으로 등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명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라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세아를 향해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언니, 그런데…… 여기 이상하게 오래 있네? 벌써 몇 달인데. 원래 생贄는 그렇게 오래 못 산다던데." 그 말에 세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었고, 강도윤 역시 미묘하게 표정이 변했다. 세아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 짧은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소라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눈빛만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세아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소라는 그저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글쎄, 그건 언니가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소라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했는데, 그 태도가 오히려 세아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한지호 역시 그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 속에는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성문 앞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세 사람과 강도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표조차 그 분위기를 감지한 듯 세아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바짝 붙였고, 세아는 그 온기에 의지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아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정적이야말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서막임을, 세아는 온몸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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