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기 힘들었다. 발끝을 조금 꼼지락거리는 것만으로도 허벅지 안쪽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팔은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게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고, 숟가락을 쥐는 힘도 돌아왔다.
이헌은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죽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시간은 신기하게도 일정했다. 창밖의 빛이 방 안 나무 바닥에 특정한 각도로 떨어질 때쯤, 정확히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그릇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저 사람, 시계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 정확한 거지.'
'설마 하루 종일 문밖에서 시간을 재고 있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비취는 방 안팎을 들락거리며 나를 감시하듯 지켜보았다. 창턱에 앉아 날개를 접고 있다가, 내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즉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마치 도망칠까 봐 경계하는 듯한 태도였다.
"안 도망가요." 내가 말했다.
"누가 뭐래." 비취가 시선을 피했다. "그냥 보는 거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거잖아요."
"…비슷한 거지."
이상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잠들 때마다 낯선 것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은 좁은 방 안에 네모난 상자가 있고, 그 상자 안에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보였다. 화면 속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는데, 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텔레비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통로에 줄지어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이었다. 다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고, 어디선가 안내 방송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지하철'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는데, 그게 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앉는 좌석의 색깔, 벽에 붙은 광고판의 모양까지도 이상하게 선명했다.
'이게 뭐지.'
'이 세계에서 겪은 일이 아닌데.'
나는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장의 나뭇결을 눈으로 따라가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세계의 기억은 오히려 흐릿했다. 내 부모의 얼굴도, 내가 태어난 마을의 풍경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애를 써서 떠올리려 하면 안개 속에서 흐릿한 형체만 잡히다가 이내 흩어져 버렸다.
대신 낯선 도시의 불빛, 처음 듣는 말투, 처음 보는 물건들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간판의 불빛, 차가 지나갈 때 나는 소리, 손안에 쥐고 화면을 들여다보는 작은 판 같은 것까지.
'이 정도로 생생한데, 정말 내 기억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뭐지, 이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밥 먹어." 그날도 이헌이 죽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에서는 늘 같은 냄새가 났다. 곡물 냄새와 약초 냄새가 섞인, 그다지 맛있지는 않지만 먹으면 몸이 나아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죽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받아 들며 무심코 말했다. "이거… 편의점 도시락 맛이랑 비슷하네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나조차도 흠칫했다. 내가 방금 뭘 말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 이헌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나에게 머물렀다.
"아, 아니에요." 나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그냥,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
"편의점이 뭔데." 창턱에 앉아 있던 비취가 날개를 접으며 물었다. "그런 말 처음 들어봐."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애써 웃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비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뭐야?"
"뭐긴 뭐예요, 사람이죠."
"사람이 왜 알 수 없는 말을 해?"
"그건… 저도 궁금해요."
정말 궁금했다. 나조차도 이 말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잘못 섞여 들어온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두 개의 기억이 한 그릇에 뒤섞인 국처럼 서로 엉켜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이 세계 사람이라면 누구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계에서 온 게 아니라면?'
'다른 세계에서 오기라도 한 건가,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붉은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내 안에 숨겨진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진지한지, 방 안의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다." 이헌이 시선을 거두었다. "됐다. 밥 다 먹으면 쉬어라."
그는 자리를 떴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걸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비취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인간, 뭔가 숨기고 있어. 이헌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숨기는 거 없어요." 나는 반박했지만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할 때 목소리 떨리는 거 알아?"
"안 떨렸어요."
"떨렸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반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뭘 숨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세계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낯선 지식과 감각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밤이 되면 그 감각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눈을 감으면 낮 동안 억눌러 놓았던 낯선 도시의 풍경이 다시 밀려왔다. 그 풍경 속에 있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누군가였을까.
'만약 그게 나였다면.'
'왜 나는 그걸 기억하는 거지.'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뒤척였다. 다리가 뻐근하게 저려왔지만 그보다 머릿속을 채운 물음들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게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취의 낮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잠들지 않고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그 낯선 세계의 풍경이 떠오를까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답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