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나흘째부터는 겨우 방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짚어야 했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문틀을 잡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이헌이 뒤에서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는 늘 그렇게 짧게 말했다. 걱정인지 명령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어조로.
나는 그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방문을 나서자 좁은 회랑이 펼쳐졌다. 나무 바닥은 오래되어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벽에는 낡은 등불이 걸려 있었다. 회랑 끝에는 작은 창이 있어 그곳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껴 들어왔다.
그리고 그 회랑이 끝나는 지점에, 현관이 있었다.
"방 밖 회랑까지만." 그가 말했다. "현관을 넘어가면 안 된다."
"왜요?" 내가 물었다.
"위험해서."
"무슨 위험인데요?"
"몰라도 된다."
대답은 늘 그런 식이었다. 짧고, 단호하고,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그 대답의 틈을 파고들려 했다.
"동물이 있어요?"
"아니."
"사람이요?"
"……"
"대답을 안 하는 게 더 무섭거든요."
그는 그 말에 잠깐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넘어가지 마."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 침묵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자꾸 상상하게 됐다.
'혹시 나를 어딘가에 팔아넘기려는 건 아닐까.'
'낙인 있는 사람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물건으로 취급받는 거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떨렸다. 나는 손목에 남은 흉터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이 몸에 새겨진 낙인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죽을 가져다주고,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그 손길이 조금도 거칠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그는 연고를 바를 때마다 내 살갗이 닿기 전에 손을 데우기라도 하듯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런 세심함은 위협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팔아넘길 물건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까.'
두 가지 생각이 자꾸 부딪히며 나를 지치게 했다. 낮 동안에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내고 걷는 연습에 집중했다. 회랑을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몸은 지쳤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밤이었다. 달빛이 숲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마당의 흙바닥에 얼룩무늬를 그렸다.
그때,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헌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창틀에 몸을 붙였다.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손을 들었다. 순간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곧바로 새하얀 서리로 뒤바뀌었다. 그 불과 얼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광경은 이상하게도 아름답고 두려웠다. 불꽃이 사그라드는 자리마다 허공에 서리가 맺혀 잠시 반짝였다가 흩어졌다.
그는 그렇게 얻은 냉기로 사냥해 온 짐승의 사체를 통째로 얼려 보관하고 있었다. 커다란 짐승 하나가 순식간에 표면부터 딱딱하게 얼어붙는 모습을, 나는 창틀 뒤에서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저게 그 사람이 가진 힘이구나.'
'빙염제.'
어디선가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그 이름이 그의 것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불과 얼음을 동시에 다룬다는 존재. 그런 게 실제로 있다는 것도, 그런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중, 이헌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나는 몸이 굳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창틀 뒤로 몸을 숨길 새도 없었다.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는 것도 어색해서, 나는 그냥 얼어붙은 채로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봤나.'
'아니, 이미 봤겠지.'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지만 정작 입은 열리지 않았다.
"왜 안 자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마당을 건너 낮게 울렸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나는 읽어낼 수 없었다. 경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나는 괜히 초조해져서 말을 덧붙였다.
"저, 방금 그거…… 신기해서요. 불이랑 얼음이 같이."
"볼 거 없어."
"그래도 궁금해서요. 어떻게 그게 같이……"
"들어가서 자." 그가 말을 잘랐다. "밤공기가 좋지 않아."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대화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늘 그랬듯이.
그는 다시 등을 돌려 얼린 짐승을 지고 자리를 옮겼다. 어깨에 짊어진 그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그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타오르던 불꽃도, 새하얀 서리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짐승의 핏자국과 흙에 남은 발자국뿐이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나는 저 사람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도망쳐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만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나는 창문을 닫으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저 멀리, 숲의 경계 너머로 아주 희미한 불빛이 움직이는 게 보인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빛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인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곧고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다시 보니 그 빛은 사라져 있었다.
'잘못 봤나.'
그리고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숲 밖의 세상이, 나를 완전히 잊었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저 불빛이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 숲에 나와 이헌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도 전에, 나는 이미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