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살배기 황태자비

1화

쿵. 둔중한 소리에 눈을 떴다. 발밑에서 푸른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은 내가 알던 그 어떤 마법진과도 달랐다. 동그란 원 안에 별 모양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고, 그 선을 따라 은빛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문양이 천천히 숨을 쉬듯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조금 전까지는 침실이었다. 시녀가 가져온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눈앞이 핑 돌더니 정신을 놓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선 지하실 한가운데였다. 찻잔에 뭘 탄 건가. 아니면 그 차 자체가 함정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시녀의 표정이 유난히 딱딱했던 것도 걸린다. 주변을 둘러봤다. 돌벽에는 이끼가 껴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흔들리듯 타올랐다. 습기가 밴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벽 틈 사이로 스며든 냉기가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저 앞에, 검은 로브를 두른 존재가 서 있었다. 얼굴은 면포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존재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저렇게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분명 이 방으로 나를 데려온 건 아버지 윤재훈 공작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엔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조금 전까지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정확히는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아버지였는데. 버려졌다. 그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하, 이런 전개는 또 처음이네. 인생 두 번째 살면서 별의별 배신은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딸을 지하실에 팽개치고 사라지는 아빠는 신박하네. 나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인간, 윤아영. 어느 날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이 몸, 청하국 공작 영애 아리의 몸속이었다.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했다. 시험 기간에 밤새워 과제하다가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 세계가 낯익었다. 정확히는 이 세계의 배경이, 인물 관계가, 대사 한 줄까지도 낯익었다.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과 똑같았으니까. 전공 과제 미루고 밤새 붙잡고 있던 그 모바일 게임. 스토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짜여 있어서 과금까지 하면서 정주행했던 그 게임. 그 게임 속에서 '아리'는 조연도 아니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악역 영애였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다가 결국 파멸하는, 그런 흔한 캐릭터. 그 캐릭터의 몸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다. 망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게임 속 세계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관찰자처럼. 여주인공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스토리에 얽힐 만한 이벤트는 전부 피해 다녔다. 덕분에 파멸 루트는 벗어났다고 자축하던 게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그런데 오늘, 이 지하실에서 그 평화가 끝났다. 검은 로브의 존재가 손을 들었다. "윤아영. 아니, 아리." 목소리가 들렸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낡은 종이를 넘기는 듯한 음색이었다.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세계에서, 그것도 이런 지하실에서, 전생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가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네가 왜, 어떻게……"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가 면포 안에서 웃는 듯한 기척을 흘렸다. 웃음소리조차 나지 않았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알았다. "시간의 마녀, 설매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철컥 맞물렸다. 게임 설정집에서 딱 한 줄로 언급됐던 조연.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았던 그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서브 퀘스트 하나 클리어하면 배경 텍스트로 잠깐 스쳐 지나가던 이름. 그런 존재가 실체를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당신이 왜 여기……" "청하국 국왕의 부탁을 받았느니라." 부탁. 그 단어가 참 우아하게도 포장됐다. 부탁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게 뭔지, 나는 온몸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국왕이 마녀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뭐가 있겠어. 좋은 일이면 이렇게 지하실에 몰래 끌고 와서 처리할 이유가 없잖아. "무슨 부탁인데요." "시간을 되돌리는 것." 순간, 발밑의 마법진이 폭발하듯 밝아졌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자, 잠깐, 무슨 시간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붕 뜬 게 아니라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뼈마디가 오그라들고, 시야가 낮아지고, 옷자락이 몸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관절 하나하나가 안으로 접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가, 곧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아……!" 비명조차 목에서 이상하게 새어 나왔다. 성대까지 작아진 건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쓴 것처럼 낯설었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마침내 초점이 맞았을 때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뺨에 그대로 와 닿았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조막손이었다. 손가락은 짧고 통통했고, 손톱은 반달 모양으로 작았다. 열여덟 살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손등에 옅게 남아 있던 흉터도, 손톱 끝에 발랐던 투명 매니큐어 자국도 없었다. 그야말로 새것 같은 손이었다. 설마. 헐렁해진 옷을 내려다봤다. 원래 몸에 맞았던 드레스가 이제는 이불처럼 나를 덮고 있었다. 레이스 장식이 바닥까지 늘어졌고, 허리끈은 아예 흘러내려 발치에 뭉쳐 있었다. "이게 무슨……" 목소리를 내려는데, 그 목소리가 또다시 낯설었다. 새되고, 가늘고,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마치 성대모사를 못하는 사람이 억지로 아이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색했다. 설매가 나를 내려다보며 면포 아래로 낮게 읊조렸다. "네 살이다." 네 살.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방금 들은 그 두 단어가 이해되지 않아서,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네 살, 네 살, 네 살. 이건 무슨 상황이지. 열여덟 살로 조용히 숨어 살던 인생이 갑자기 네 살짜리 유아로 리셋된다고? 나이 앞자리가 아예 통째로 날아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상황이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 시나리오 어딘가에서, 딱 한 줄로 지나갔던 대목. 청하국이 존속을 위해 영애를 어린아이로 바꿔 제국에 보낸다는, 그 미친 설정이 실제로 내 몸에 벌어지고 있었다. 서브 텍스트로 흘려 읽었던 그 문장이,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통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도리가 있나 없나를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이미 손가락은 조막손이 됐고,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졌고, 옷은 이불처럼 몸을 덮고 있었으니까. "이, 이런 미친……" 말끝이 흐려졌다. 발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혀가 짧아진 건지, 어금니가 통째로 사라진 건지, 발음이 뭉개져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설매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다음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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