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살배기 황태자비

2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렸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고, 눈은 원래보다 훨씬 크고 동그래져 있었다. 볼은 손으로 꾹 누르면 쏙 들어갈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내 볼을 살짝 눌러봤다. 정말로 쏙 들어갔다. 말랑말랑. 이거 완전 마시멜로우 아니냐. 귀엽긴 한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거울 속 아이는 손가락도 짧고, 팔목도 얇고, 옷자락 아래로 드러난 발도 앙증맞게 작았다. 열여덟 살 정신머리를 가진 내가, 딱 봐도 네 살짜리 몸에 담겨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는 하고 있었다. 마법. 회춘. 정확히는 강제 회춘. 근데 이해하는 거랑 받아들이는 거는 다른 문제였다.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파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원래 내 몸이었을 때는 이런 걸 느낀 적이 없었는데. "……"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끼익. 경첩 소리마저 이 저택에서는 고급스러웠다. 소리 하나까지 다 돈 발라놓은 느낌이랄까.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 윤재훈 공작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여러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을 짓누르는 다른 무언가. 계산. 아버지는 늘 그랬다. 딸을 볼 때도 손익을 먼저 따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릴 때는 그게 서운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수준이 됐다. 적응이라는 게 참 무섭다. "아리." 낮은 목소리였다. 언제나처럼. "……저 아리 아니에요. 지금은 유아예요." 농담이랍시고 던졌는데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썰렁했나. 아버지는 대신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 맞췄다. 큰 키가 접히듯 낮아지는 게 낯설었다. 어릴 때도 이렇게 눈을 맞춰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국왕 전하께서 결정하셨다. 너를 강도제국의 황태자비로 보내기로." 황태자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게임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이 저절로 펼쳐졌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열여덟 살의 아리는 정략결혼을 명분으로 강도제국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황태자비 후보들과 암투를 벌이다가, 결국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다. 그게 이 캐릭터의 유일한 엔딩이었다. 수십 번을 플레이해도 바뀌지 않던 결말.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건, 원래는 제가 열여덟 살에 벌어지는 일이었을 텐데요." 혼잣말처럼 흘렸는데 아버지가 흠칫했다. 작은 어깨가 움찔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소리냐." "아, 아뇨. 그냥……" 말을 삼켰다. 아버지에게 게임 시나리오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사람 취급받거나, 혹은 더 나쁘게, 이용당할 수도 있었다. 원작 지식이라는 거, 이 세계에서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흉기가 될 수도 있다. 함부로 꺼내 들면 나만 손 베인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네 살짜리 성대라 그런지 원래 내려던 어조보다 훨씬 앙증맞게 나왔다. 진지하게 말하려고 해도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게 슬펐다.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도제국 황실에는 오랜 관례가 있다. 황태자비는 반드시 유년기부터 궁에서 함께 자라야 한다는." "그게 무슨 미친……" 말이 튀어나오다 멈췄다.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까지 막말하는 건 좀 아니지 싶었는데, 이미 반은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가주는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이전에 성인이 되어 들어간 혼약자 후보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파혼당하거나, 심지어 죽었다. 황제는 더 이상 성인 신부를 받지 않겠다 선언했지." 아, 그렇구나. 원래 시나리오에서 성인 아리가 겪었던 그 죽음의 궁중 암투. 그게 청하국에게는 이미 알려진 리스크였던 거다. 다른 나라 영애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청하국이 택한 방법이 바로 이거였다. 마법으로 나이를 되돌려서, 어린아이로 미리 보내는 것. 머릿속에서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딸깍. 그러니까 이건 청하국이 짜낸 '리스크 관리' 였던 거다. 회사로 치면 위험한 프로젝트에 신입 대신 아예 갓 태어난 신생아를 투입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러니까, 제가 성인으로 갔으면 죽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예 애기로 만들어서 보내겠다는 거예요?" "……그렇다." "미쳤어."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나도 딱히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방 안 공기가 무거웠다. 창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명랑한 소리가 이 방의 분위기랑 하나도 안 어울렸다. "청하국은 강도제국의 그림자 아래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나라다.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으면, 청하국은 다음 침략 대상이 될 거다." "그래서 제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겠다는 거네요." "……죄송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죄송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상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죄송하다면서, 결정을 되돌릴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게 제일 웃겼다. 사과랑 행동이 완전히 별개로 움직이는 거. 직장 상사가 "미안한데 이번 주말에도 나와야 할 것 같아" 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아니, 이건 비교가 좀 그런가. 내 인생이랑 주말 출근을 같은 급으로 놓는 것도 웃기긴 한데, 지금 상황에서 진지하게 슬퍼하기엔 이 작은 몸뚱이가 너무 어색해서 자꾸 딴생각으로 도망치게 됐다. "언제 떠나요." "보름 후." 보름. 짧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열여덟 살 정신으로 네 살 몸을 어떻게든 다뤄야 하고, 강도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돌렸다. 보름. 열다섯 날. 그 안에 걸음걸이는 좀 더 안정시켜야 할 거고, 젓가락질도 다시 익혀야 할 거고, 무엇보다 이 성대로 논리적인 문장을 발음하는 연습도 해야 할 거다. 할 게 산더미인데, 몸이 협조를 안 해준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몸으로는, 이 나이로는,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는 걸. 열여덟 살 지능이 있어도 네 살짜리 팔다리로는 검을 쥐지도 못하고, 말 위에 올라타지도 못한다. 성인 몸이었다면 도망이라도 시도해볼 텐데, 이 작은 몸으로는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시종의 손을 빌려야 했다. 원래 시나리오는 이미 뒤틀렸다. 열여덟 살에 벌어질 일이 네 살에 당겨져서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원작 지식이라는 치트키도 이제는 반쪼가리밖에 못 쓴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미지의 영역에서, 열여덟 살 정신을 가진 네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발버둥 쳐도 안 되면, 일단 힘을 뺀다. "……그냥 지켜보기만 할게요." 작게 중얼거린 그 말에,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의 무릎이 아직도 내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고, 그 낮은 시선 너머로 죄책감과 계산이 여전히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이 사람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이 판을 어떻게든 읽어내야 했다. 보름 후, 나는 낯선 제국의 궁에 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원래 시나리오라면 나를 죽였을 사람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다만 이번엔, 그들도 네 살짜리 신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힐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저들의 계산 밖에 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조차 아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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