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하, 저는 이제 용입니다

1화

예천 공작가의 후원에는 매화가 한창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흩어져 정자 지붕 위로 떨어졌다. 이서린은 그 아래 놓인 정자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었다. 바늘 끝이 천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 땀, 두 땀. 손끝의 움직임은 오래된 습관처럼 정확했다. 다섯 살 때부터 배운 자수였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놓을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다음 달이면 혼례다.' 그녀는 그렇게 되뇌며 바늘을 다시 찔러 넣었다. 5년이었다. 주헌과 정혼한 지 5년이 지났다. 처음 궁에 인사를 올리러 갔던 열다섯 살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 시간 동안 계절은 다섯 번 바뀌었고, 매화는 다섯 번 피었다가 졌다. 시비 하나가 다가와 찻물을 새로 올렸다. 김이 오르는 잔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다. "공녀님,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비의 목소리에 서린은 자수틀을 내려놓았다. 실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은 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시 놓을 자수였다. 정자 아래로 붉은 머리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대현국의 왕태자, 주헌이었다. 걸음걸이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웠고, 뒤따르는 시종들과의 거리도 일정했다. 그의 눈동자는 머리카락과 같은 빛깔이었다. 붉고, 강렬하고,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색. 처음 그 눈을 보았을 때 서린은 열다섯이었고, 그 색이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익숙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주헌이 정자에 올라 그녀 곁에 앉았다. 앉는 동작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왕태자로서의 품위는 몸에 새겨진 습관 같았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바쁘신 걸 아는데요." 서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정 회의가 길어졌소. 대신들이 하나같이 말이 많아서." 주헌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편하군." "그런 말씀은 대신들이 들으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서운해도 좋소. 사실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담백하고, 다정하고, 조금은 예의를 갖춘. 서린은 시비에게 찻잔을 하나 더 가져오라 일렀고, 주헌은 그 사이 정자 너머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올해도 꽃이 곱소." "작년보다 조금 늦게 피었다고 정원사가 그러더군요." "그런가." 주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화제는 아니었지만, 대단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린은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것은 안정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궁정의 혼사가 대개 그렇듯, 두 사람의 정혼도 애정보다는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그 필요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함으로, 익숙함이 다시 편안함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 5년 전, 처음 궁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열다섯이었다. 아버지 이헌 공작의 손을 잡고 대전에 들어섰던 그날, 대전의 기둥은 유난히 높아 보였고 발밑의 대리석은 차가웠다. 왕은 흡족한 얼굴로 두 아이를 나란히 세웠다. "예천 공작가와 왕실의 결속은 나라의 근간이 될 것이다." 왕의 말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신들이 저마다 고개를 조아리며 경하를 올렸다. 축하의 말들이 대전을 채웠지만, 서린의 귀에는 그 말들이 하나같이 멀게 들렸다. 서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근심이었다. 기쁨보다는 근심이 앞선 얼굴. 그날 밤, 공작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이헌 공작은 말이 없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아버지,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그날 밤 서린이 물었다. "아니다." 이헌 공작은 짧게 답했다. "그저... 네가 걸어갈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제가 태자 전하와 혼인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나쁜 일은 아니다." 공작은 서린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왕실이라는 곳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이 다른 곳이니라. 명심해라. 누군가의 웃음 뒤에는 반드시 다른 것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열다섯의 서린에게 그 말은 그저 아버지의 걱정 많은 성정에서 나온 잔소리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 지금도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최근 들어 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는 것만은 눈치챘다. 처음에는 그저 조정 일이 바빠 그런가 보다 여겼다. 하지만 그늘은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아버님, 요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서린이 저녁상에서 물었다. 젓가락을 든 이헌 공작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정 일이 좀 복잡할 뿐이다." 이헌 공작은 술잔을 들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 "제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더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서린은 술잔을 채워주며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주름이 언제 이렇게 늘었는지, 흰머리가 언제 이렇게 많아졌는지 새삼스러웠다. "몸은 괜찮으신 거지요?" "괜찮다. 그저 늙어가는 게지." 이헌 공작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서린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파헤치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상을 물리고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다음 달이면 혼례다.' 그녀는 다시 그렇게 되뇌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근심도 혼례가 끝나면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다시 정자, 다시 매화 아래. 며칠이 지난 오후였다. 날씨가 부쩍 따뜻해져서 정자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았다. "근래 소이를 자주 만난다고 들었소." 주헌이 문득 말을 꺼냈다. 강소이. 서린의 어릴 적부터의 친우이자, 근래 궁에 자주 드나드는 백작가의 여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서린의 곁을 지켰던 유일한 벗이었고, 궁정의 복잡한 예법 속에서도 서린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대였다. "네. 성정이 밝아서 곁에 두면 즐겁습니다." 서린이 답했다. "요즘은 혼례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소이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그렇군." 주헌은 짧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그 순간의 침묵이 서린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곧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을 그였다. 소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몇 마디 더 묻고, 웃으며 넘기던 그였다. "전하?" 서린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아, 아니오." 주헌이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냥... 그대가 즐거워한다니 다행이라 생각했을 뿐이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서린은 속으로 물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5년을 함께한 사이였다.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곧 있을 봄 연회에 대해, 그리고 혼례 당일 입을 예복의 색에 대해. 대화는 다시 평온한 흐름을 되찾았지만, 서린의 마음 한구석에는 방금의 침묵이 작은 돌처럼 남았다. 혼례가 다음 달이었다. 예복도, 예물도, 궁정의 절차도 대부분 마무리되어 있었다. 이헌 공작이 직접 검토한 예단 목록이며, 왕실에서 내려온 혼례 절차 문서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뿐이었다. 적어도 서린은 그렇게 믿었다. +++ 밤이 깊었다. 서린은 침소에 누워 낮에 있었던 주헌의 침묵을 되새겼다. 5년을 지켜본 그의 표정 중, 처음 보는 종류의 표정이었다. 놀란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접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는 법이었다. 태자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창밖으로 매화 향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향은 짙어지다가 다시 옅어졌다. 평온한 밤이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서린은 눈을 감았다. 내일은 소이와 함께 시장 구경을 가기로 했었다.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 그런지 마음이 조금 들뜨기도 했다. '아버님의 근심도, 전하의 침묵도, 혼례가 끝나면 자연히 풀릴 일일 거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평온이 얼마나 얇은 얼음 위에 서 있는지, 서린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얼음 아래로 어떤 물살이 흐르고 있는지도, 그녀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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