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하, 저는 이제 용입니다

5화

왕궁의 알현실은 넓고 서늘했다. 이헌 공작은 그 중앙에 홀로 서 있었다. 예복을 갖춰 입었지만, 그 위엄은 평소와 달리 무겁게만 느껴졌다. 사흘 밤을 새운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끝은 서류를 쥔 채로도 미세하게 떨렸다. 왕좌에는 대현국의 왕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주헌이 서 있었다. 왕태자의 시선은 이헌 공작을 향해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동정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관찰이었다. 알현실로 들어서기 전, 이헌 공작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딸의 어릴 적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서린이 대여섯 살 무렵, 공작저 뒷마당에서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도 울지 않고 이를 악물던 아이였다. '아버지, 저는 울지 않아요.' 그때 그 조그마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 아이가 지금 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문지기가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이헌 공작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폐하, 소신은 딸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헌 공작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서류 한 뭉치가 들려 있었다. 며칠 밤을 새워 모은 것들이었다. 서린의 처소를 드나든 자들의 명단, 독약의 출처를 추적한 기록, 강소이의 행적을 조사한 문건. 종잇장 하나하나에 그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닌 발자국이 배어 있었다. "말해보라." 왕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헌 공작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조여왔다. "소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건 당일 서린의 처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는 지정된 시비들 외에는 강소이의 측근으로 알려진 하인 하나뿐이었습니다. 그자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사건 발생 시각에..." "공작." 왕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재판은 이미 끝났다." "하오나 폐하, 새로운 증거가..." "이미 끝난 재판이다." 왕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여지가 없었다. 이헌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이럴 수는 없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최소한 들어보시기라도...' 그는 서류를 두 손으로 받쳐 들어 올렸다. 팔이 저릴 정도로 무거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떤 갑주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폐하, 제 딸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최소한 이 서류를 검토해주시기를..." "공작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왕이 자리에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딸을 구하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이것은 국법에 관한 일이다." "국법이라면 더더욱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헌 공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알현실에 정적이 흘렀다. 왕의 표정이 굳었다. 신하가 왕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대현국 법도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알현실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창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누구도 소리 내어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의 무게가 이헌 공작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헌 공작은 그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의 목이 잘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공작." 이번에는 주헌이 입을 열었다. "그 서류들이 진짜 증거라 확신하는가." "전하, 저는 조사관을 동원해..." "조사관은 공작가의 사람들이겠지." 주헌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객관성을 논하기엔 부족하지 않소." 이헌 공작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조사관은 공작가에 소속된 자들뿐이었다. 왕실 소속 조사관은 이미 강소이 측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고, 그 사실을 이헌 공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이미 판을 짜놓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왕실의 조사관을 붙여주십시오. 소신이 가진 증거를 검증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헌 공작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예복의 자락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이헌 공작에게는 한 줌의 희망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크게 들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판결이 난 사건에 재조사를 붙이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흔드는 일이다. 짐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폐하..." "물러가라, 공작." 왕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닫혀 있었다. 이헌 공작은 그 자리에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서류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젊은 시절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작가의 힘은 검이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왕실의 신뢰를 잃는 순간, 그 어떤 군세도 무용지물이 된다.' 지금 이 순간, 그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이헌 공작은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 이헌 공작은 알현실을 나서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밤을 새워 모은 증거들이, 왕좌 앞에서는 한 장의 휴지조각보다도 못한 것이 되어버렸다. 서기관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주변에 다른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공작님, 그 서류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헌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오늘 알현의 내용은 공식 기록에 남기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서기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누구의 명인가." 이헌 공작이 서기관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간 탓에 서기관의 얼굴이 일순 하얗게 변했다. "저는...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서기관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더 캐물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 겁먹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헌 공작은 붙잡은 팔을 천천히 놓았다. 서기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이헌 공작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기록조차... 되지 않는다니.' 최고 귀족가의 위세도, 딸의 무죄를 밝히려는 아비의 절박함도, 왕태자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공작가가 지닌 수백 년의 역사와 권세가, 오늘 이 알현실의 침묵 앞에서는 먼지처럼 흩어져버린 것이다. "공작가의 힘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서류를 품에 다시 넣었다. 서류를 접어 넣는 손길이 평소와 달리 어설펐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딸이 형장으로 향할 시간이 이제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서린아, 조금만 기다려라. 아비가 반드시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했다. 이헌 공작은 궁 밖으로 나서며 마지막 방법을 떠올렸다. 왕의 동생, 대비, 혹은 다른 귀족가들과의 연대. 무엇이든 시도해야 했다. 평소라면 자존심 때문에 손을 내밀지 않았을 자들에게조차, 지금은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몇 개의 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대비전에 아는 상궁이 있었다. 왕의 동생인 진왕과는 예전에 몇 번 술잔을 나눈 사이였다. 어느 쪽이든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고, 그 시간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궁문을 나서기도 전에, 저 멀리 형장으로 향하는 죄인 호송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행렬을 둘러싼 병졸들의 창끝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행렬의 중앙에, 하얀 죄수복을 입은 서린이 걸어가고 있었다. 결박된 손목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낯빛이 이헌 공작의 눈에 한꺼번에 들어왔다. "안 된다..." 이헌 공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발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손에 쥔 서류가, 조사관도, 왕실의 신뢰도, 그 어느 것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딸의 뒷모습만이 전부였다.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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