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했더니 왕비 후보라니

1화

샹들리에 불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왕태자궁의 대연회장에서, 유하린은 붉은 드레스 자락을 끌며 사람들의 시선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석 달 전 재단사가 밤을 새워 지었다던 이 드레스만 해도 왕도 상단 세 곳을 돌아 겨우 구한 홍염사로 지은 것이었는데, 그런 사치스러운 걸 입고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 자신이 한 폭의 그림 속 배경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설란국 유씨 공작가의 외동딸이자 왕태자의 정혼자라는 이름은 오늘 밤을 기점으로 산산조각 날 참이었는데,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악사들의 현악 소리가 은은하게 깔리고, 귀족들은 저마다 부채를 흔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유하린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익숙한 미소로 답례하면서도 오늘따라 왕태자의 눈빛이 이상하게 서늘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린 님." 왕태자가 그녀를 불렀을 때,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다정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냉기가 서린 듣기 싫은 격식체였는데,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왕태자의 옆으로 처음 보는 여인이 스르륵 다가와 팔짱을 꼈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촛불 아래서 은사처럼 반짝였고, 눈매는 세필로 그린 듯 가느다란 선처럼 정교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어디에도 온기는 없었다. 유하린은 순간적으로 저 여자는 누구인가, 왜 저렇게 태연하게 웃고 있는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질문을 굴렸지만 입 밖으로 낼 새도 없었다. "소개하겠소. 이제부터 나의 정혼자가 될 사람이오." 악단의 연주가 뚝 끊기고,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유하린에게로 쏠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왕태자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유하린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었는데,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는 것을 억지로 삼켜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자식이…… 지금 여기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담담했다. 스스로도 이 순간에 어떻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는데,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으면서도 등뼈만은 곧게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는지, 여인은 승리감이 서린 웃음을 지으며 왕태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 하린. 뒤에서 국고를 빼돌려 자기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걸."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누군가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소곤거렸다. "설마 저 조신한 유 공작 영애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증거가 저렇게……" 그런 말들이 파편처럼 그녀의 귓가에 박혔다. 유하린은 그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는데, 정작 뭐라 항변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국고를 빼돌렸다니,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누명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가, 이내 지워졌다. 아버지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버지가 없어서 더 두렵다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겨우 뱉은 한마디가 얼마나 초라하게 들리는지, 그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없다고? 증거가 이렇게 넘치는데도." 여인이 손짓하자 시종이 서류 뭉치를 들고 나타났고, 조작된 문서라는 걸 눈치챌 겨를도 없이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유하린을 죄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 표지에 찍힌 인장까지 낯이 익어서, 유하린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저건 분명 아버지의 서재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는데. "저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런 서류를 본 적도 없습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그녀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왕태자는 그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오늘부로 우리의 혼약은 파기되었소. 유하린, 당신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소."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대사를 읊는 사람처럼 매끄러웠다. 그 매끄러움이 유하린의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짝. 부채를 접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유하린은 그 순간 자신의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는데, 수치심인지 분노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곳은 여전히 그녀를 지켜보는 눈들로 가득했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3년을, 그녀는 생각했다. 3년을 이 사람 곁에서 웃었는데, 그 시간이 통째로 조작된 서류 몇 장에 짓눌려 사라지는 데는 촛불 한 자루가 다 타기도 전이면 충분했다.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마지막 예를 갖춘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걸어나갔다. 걸음걸음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수군거림이 화살처럼 박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치맛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또렷했고, 그 소리마저 그녀에게는 마치 자신의 심장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여유조차 그녀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연회장 밖,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기둥에 이마를 기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울지 않아, 여기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정원의 나무들은 밤바람에 조용히 흔들렸고, 저 멀리 연회장의 불빛만이 여전히 화려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저 안에서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악역영애라니……." 누군가 속삭이는 말이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 말이 앞으로 자신을 부를 이름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이 왜 이렇게 낯설지 않게 들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정원 구석, 낡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흔한 가문의 문장도 새겨져 있지 않은, 낡고 수수한 마차였는데, 이런 밤에 이런 곳에 저런 마차가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낯선 남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하린은 그날 밤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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