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했더니 왕비 후보라니

2화

수도를 벗어나는 마차 안에서 유하린은 사흘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답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파혼을 통보받던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그 순간, 화려하게 차려입은 몸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던 그 순간. 유하린은 눈을 감고 그 기억을 억지로 밀어냈다. 지금 떠올려서 좋을 게 없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좁은 산길을 오르내렸고, 창밖 풍경은 점점 낯설어졌다. 수도의 매끈한 도로와는 달리 흙과 돌이 그대로 드러난 길이었는데,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하린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그 흔들림조차 낯설어서, 이상하게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울리는 듯했다. 마차를 몰아 온 사람은 이태오였다. 유씨 공작가와 먼 인연이 있던 라도 백작가의 젊은 영주로, 연회 소식을 듣자마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도움을 자처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담담한 얼굴로, 유하린이 갈 곳이 없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마차를 끌고 왔다. 수도의 어느 귀족도 나서지 않았던 그 순간에, 정작 나선 사람은 유하린과 이렇다 할 인연조차 없던 이 남자였다. "백작님." 유하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 이태오는 마부석에서 고개만 살짝 돌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저, 필요라는 게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마침 라도에 방이 남아서요. 딱히 큰 뜻은 없습니다." 큰 뜻이 없다는 말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는데, 유하린은 왜인지 그 말에 잠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큰 뜻이 있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내미는 손이,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라도 백작령은 수도에서 배를 타야 닿을 수 있는 작은 섬 영지였고,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땅이었다. 유하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항구에 가까워질수록 짠 바람 냄새가 마차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 냄새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공기였다. 마차가 항구에 닿았을 때, 이태오는 짐을 옮기며 몇 가지 규칙을 조심스레 꺼냈다. 낡은 나무 상자를 어깨에 짊어진 그의 모습은 백작이라기보다는 그저 부지런한 청년처럼 보였다. "저희 집에 머무시게 되면, 그, 몇 가지만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셈을 하듯 말했다. "첫째, 식사는 함께합니다. 저희 영지엔 하인이 많지 않아서요. 둘째, 저녁 아홉 시 이후엔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습니다. 밤에는 섬이 좀 위험하거든요. 셋째……." "셋째는요?" "셋째는, 저를 그냥 태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백작이라는 말이 붙으면 자꾸 제가 뭐 대단한 사람 같아서요."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지한 규칙 발표라기보다 어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유하린은 그 순간 처음으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회장에서의 굴욕 이후 처음 지은 웃음이었는데, 스스로도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놀랐다. 사흘 동안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낯설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태오 님." "님은…… 굳이 안 붙이셔도."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그, 그건 나중에 정하죠." 그는 짐 상자를 다시 고쳐 잡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을, 유하린은 보지 못했다. 항구에서 저택까지는 마차로 반 시간 정도 더 걸렸다. 길가에는 낮은 돌담이 늘어서 있었고, 담 너머로는 양을 치는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 이태오는 그 노인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노인 역시 백작이라는 호칭 없이 그저 "태오야!" 하고 불렀다. 유하린은 그 다정한 부름을 들으며, 이곳에서는 신분이라는 것이 그다지 무거운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도 백작가의 저택은 유하린이 살던 공작가의 저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작고 낡았다. 벽지는 군데군데 색이 바랬고, 응접실 소파는 실밥이 터져 있었는데, 그마저도 이태오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성큼성큼 안내했다. "수도의 저택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편히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들어서자 나이 든 하녀가 허둥지둥 나와 인사를 건넸는데, 이태오는 그녀를 향해 "이쪽은 유하린 님이십니다, 앞으로 함께 지내실 거예요"라고 소개했다. 함께 지낸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들려서, 유하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유하린은 낡은 벽지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려함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수도의 삶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거짓이 없는 공기가 이 집 안에 가득했다. 벽지의 얼룩 하나, 소파의 터진 실밥 하나까지도 이 집이 감추는 것 없이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저녁 식사는 간소했다. 하녀가 내온 수프와 빵, 그리고 소박한 채소 요리가 상에 올랐는데, 이태오는 유하린이 수도에서 어떤 산해진미를 먹었을지 짐작하는 얼굴로 자꾸 눈치를 살폈다. "그, 입맛에 안 맞으시면……." "아니요. 맛있습니다." 유하린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오랜만에 느끼는 담백한 온기였다.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낯선 천장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파혼당한 영애라는 낙인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 낙인을 들먹이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낮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수도의 소음과는 전혀 다른 결로 그녀를 잠재웠다. 그러나 방문 밖에서 서성이던 이태오의 발걸음 소리가, 그녀가 잠들 때까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유하린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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