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혼당했더니 왕비 후보라니

4화

라도 백작령에서의 시간이 흐르면서, 유하린의 하루는 어느새 이 섬의 리듬에 맞춰 흘러갔다. 아침이면 서아와 함께 시장을 둘러보며 생선 값을 흥정하고, 낮에는 이태오를 도와 장부를 정리하며 잉크 냄새와 종이 넘기는 소리에 익숙해지고, 저녁이면 다 함께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하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제는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수도에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계산과 경계의 연속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것들이 놀랍도록 무의미했다. 왕태자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누군가의 속내를 읽어내려 애쓸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저 서아가 골라온 과일이 달콤한지, 이태오가 적은 장부의 숫자가 맞는지 정도가 유하린이 신경 쓰는 전부였다. 그날은 영지의 창고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오래된 곡물 창고에는 곳곳에 낡은 나무 상자가 켜켜이 쌓여 있었는데, 햇빛이 창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가 뽀얗게 떠다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유하린은 높은 선반 위의 상자를 꺼내려 발판 위에 올라섰는데, 낡아서 삐걱거리던 발판이 하필 그 순간 균형을 잃고 흔들리며 몸이 크게 기우뚱했다. "어, 어어……!" 짧은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심하세요!" 이태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고, 그 덕에 유하린은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대신 그의 품에 안기듯 기울어졌다. 상자에서 쏟아진 낡은 밀짚 몇 가닥이 팔랑거리며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창고 안은 조용했고, 밖에서 지나가는 마차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유하린은 그의 가슴께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세로 남자와 이렇게 붙어 있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하고 엉뚱한 생각까지 스치는 걸 보면 확실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태오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황급히 손을 뗐는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유하린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섬세하게 그려진 듯 단정했지만, 지금은 그 단정함이 살짝 허물어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그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상자를 대신 들어 선반 아래로 옮겨 놓는 척, 괜히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 아니요. 오히려 감사해요.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발판이 낡아서……. 진작 바꿔놓았어야 했는데, 제가 미리 확인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책하실 일은 아니에요. 정말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창고 안의 먼지 냄새와 어색한 침묵만을 나눴는데,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유하린의 가슴 한구석을 간질이고 있었다. 왕태자와 함께 있을 때는 느껴본 적 없는, 낯설고도 묘한 온기였다. 그 온기가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아서, 유하린은 괜히 옷자락에 붙은 밀짚을 털어내는 데 집중했다. * * * 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서아가 시장에서 사 온 감자와 양파로 끓인 수프가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 너머로, 서아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오빠,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그, 그런 거 아니야." 이태오가 서둘러 수프를 떠먹었지만, 정작 숟가락이 빈 그릇을 긁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이미 다 먹은 그릇을 자꾸 긁어대는 오빠를 보며 서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낮에 창고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 상자 정리하다가……." 이태오가 말끝을 흐리며 물잔을 들었는데, 하필이면 빈 잔이었는지 입술만 허공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아는 그 모습을 보고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유하린도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는데, 마당의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오늘 낮의 그 짧은 순간을 자꾸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왕태자를 떠나 이곳까지 흘러온 것만으로도 벅찬데, 또 다른 감정을 마주할 여유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서아가 먼저 자리를 뜬 뒤에도, 유하린은 한동안 식탁에 앉아 빈 그릇을 정리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정리한다고 정리되는 것이던가. * * * 밤이 깊어 유하린이 마당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을 때, 이태오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섰다. 그의 발소리는 신중했고, 마치 그녀의 침묵을 깨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는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섬은 밤에 별이 유난히 밝습니다. 수도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지요." "그러네요.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유하린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에 별들이 흩뿌려진 모래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수도에서는 늘 등불이 밝아서 별빛이 다 가려지지요. 저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 하늘을 보고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그 침묵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이 유하린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말과 표정을 계산하며 살아야 했던 궁정의 삶과는 정반대의 시간이었다. "영지 생활이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이태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다기보다는…… 편해요. 이상하게도." 그녀가 솔직하게 답했다. "여기선 아무도 저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요. 그냥 유하린으로 살아도 되는 거죠." "저는……" 이태오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이더니, "처음부터 다른 사람으로 본 적 없습니다." 그 말이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유하린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스쳤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시선을 돌렸다. 마당 등불이 다시 한번 바람에 흔들렸고, 그 불빛이 이태오의 옆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저, 그러니까 제 말은……." 이태오가 뒤늦게 자신의 말이 지나쳤나 싶어 허둥지둥 덧붙였다. "영지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요." "아, 네…… 그렇겠죠." 유하린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쩐지 그 정정이 조금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지만, 그 밤의 별빛 아래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조용한 변화를, 두 사람 모두 아직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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