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하윤은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부터 의심해야 했다.
분명 어젯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웹소설 연재분을 읽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화면 속 문장 하나, '그녀는 결국 여신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라는 구절이었는데, 그 문장을 읽으며 하윤은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났다. 웃기지도 않는 설정이라고, 여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한다면 왜 하필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이유로 인간을 붙잡아가겠느냐고 속으로 비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런데 지금, 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푹신한 매트리스가 아니라 차갑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었고,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방향제도 아니고 세제 냄새도 아닌, 마치 오래된 신전 깊숙한 곳에서 풍겨 나올 법한 향, 백합 냄새와 향香이 뒤섞인 듣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기묘한 향취였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던 하윤은 손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냉기에 다시 한번 놀랐는데, 그 차가움이 너무나 생생해서 이것이 꿈이라는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손끝이 시릴 리 없다고, 하윤은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천장을 가득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서는 결국 숨을 삼키고 말았는데, 그 유리창 하나하나가 온통 백합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새어 드는 빛은 마치 이곳이 세상 밖의 어딘가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나치게 신성하고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빛은 순백에 가까웠으나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마치 달빛을 그대로 걸러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윤의 왼손목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화끈―
손목을 내려다본 하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는데, 새하얀 피부 위로 검붉게 타오르는 문양 하나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백합 꽃의 형상이었으며, 마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 보았지만 지워지지도, 흐려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문지를수록 그 아래에서 열기가 더 짙게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야…… 왜 내 손목에……'
손끝으로 문양을 다시 만져보려던 하윤의 시야에, 문득 방 저편에서 걸어오는 인영이 잡혔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카락이 등 전체를 타고 흘러내리며 걸음마다 물결처럼 흩날렸는데, 그 은빛은 마치 달빛을 그대로 풀어낸 듯이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얘서 마치 방금 내린 첫눈처럼 티 하나 없이 맑았으며, 파란 두 눈은 겨울 하늘의 가장 깊은 곳을 담아낸 것처럼 서늘하고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소리가 나지 않아서, 마치 대리석 바닥이 그녀의 발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소리를 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등 뒤로, 새하얀 날개 네 쌍이 천천히 펼쳐졌다.
하윤은 그 순간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는데, 그것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깃털이 하나같이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났고, 그 빛이 움직일 때마다 방 안의 공기마저 함께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드디어 깼구나."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고, 여인은 하윤의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굽히더니 손끝으로 하윤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손끝이 닿는 순간 하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몸을 떨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존재 전체가 그 손끝 하나에 평가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누, 누구세요……."
간신히 뱉어낸 말에 여인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웃었는데, 그 웃음은 자비로운 것도 아니고 다정한 것도 아니었으며 어딘가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눈동자는 조금도 온도가 오르지 않았다.
"나는 은월의 여신, 다월이다."
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그 선언에 하윤은 순간 귀를 의심했는데,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다월은 손끝으로 하윤의 왼손목, 검붉게 타오르는 백합 문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는 이제 내 백합극의 여주인공이지."
순간 하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뭐라고……? 백합극? 여주인공?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백합극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울림이 있었다. 마치 예전에 읽었던 그 웹소설 속에서, 여신이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인간을 골라 무대 위에 세운다는 설정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이 그저 허구의 설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여신이 정한 각본 위에서, 여신이 정한 상대와, 여신이 정한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백합극이라 불리는 것이라면,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이 낙인은 그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표식일지도 몰랐다.
혼란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다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몸을 돌렸고, 그 등 뒤로 펼쳐진 네 쌍의 날개가 천천히 접히며 부드러운 깃털 소리를 냈다.
사르륵.
그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가르며 퍼지는 동안 하윤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다월의 뒷모습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자신의 왼손목이 다시 한번 지끈, 하고 뻐근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통증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마치 문양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하윤에게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저주라는 거야……? 그런데 왜 나한테……'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뿐인데, 왜 나여야 하는 거지……'
의문이 채 완결되기도 전에 다월이 다시 몸을 돌려 하윤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고, 그 파란 눈동자 안에는 웃음기와 함께 무언가 서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윤은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이 결코 단순한 악몽 한 자락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하고 말았다.
"놀란 얼굴 하지 말라니까.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야, 나의 여주인공."
그 말을 끝으로 다월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휘어졌는데,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것이 자비인지 조롱인지, 하윤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이미 어떤 배역에 던져 넣기로 결정했다는 것뿐이었고, 그 결정에 자신의 의사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도망칠 수 있을까, 이 손목에 새겨진 것으로부터……'
하윤은 떨리는 손끝으로 백합 문양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고, 그 낙인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또 한 번 뜨겁게 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