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의 시야가 갑자기 뒤틀리듯 흐려졌는데, 마치 몸은 신전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정신만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고,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온몸이 물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지는 감각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으며, 그 흐려진 시야 끝에서 며칠 전의 기억이 통째로, 마치 필름을 되돌리듯 선명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날은 평범한 등굣길이었다.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가로수 사이로 스며드는 볕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따뜻해서, 하윤은 그 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고 있었는데, 가방 속에 소중히 넣어둔 책 한 권을 이미 꺼내 걸으면서도 힐끔거리며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 아침의 기분이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웹소설 작가 한이나의 백합 장르 신작, 그것도 직접 서명이 담긴 친필 사인본이었다.
지난 사인회에서 새벽부터 줄을 서서, 발이 저려오는 것도 참아내며 밤을 새워 기다려 받아낸 물건이었고, 그날 손끝으로 전해지던 작가의 손길을, 하윤은 몇 번이고 곱씹으며 떠올렸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윤에게는 목숨보다도 귀한 물건이었으며, 좋아하는 것을 향한 오랜 기다림과 애정이 고스란히 압축된 결정체 같은 존재였다.
'오늘도 이걸 읽으면서 학교 가야지…….'
작가의 필체를 손끝으로 몇 번이나 쓸어보며 걷던 하윤의 시선이, 문득 도로 쪽으로 향했는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신호가 이미 바뀐 것도 모른 채 도로 한복판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를 폭포처럼 길게 늘어뜨린 여자였는데, 그 머리카락은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잘라낸 듯 짙고 매끄럽게 흘러내렸고, 스치는 볕에 따라 언뜻언뜻 푸른빛마저 감도는 것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으며, 하윤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표정에는 전혀 위기감이랄 게 없었고 마치 이 세상의 규칙 따위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의문은 그 짧은 순간에조차 완결되지 못했다.
부아앙―
트럭의 경적이 도로를 가득 채우며 울리는 순간, 하윤의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위험해!'
머릿속에서 어떤 계산도 이루어지기 전에, 다리가 먼저 도로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으며, 손은 이미 여자의 팔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도로로 뛰어든 하윤은 여자의 팔을 세게 잡아채듯이 온몸으로 밀어붙였고, 두 사람은 그 반동에 밀려 그대로 인도 옆 물웅덩이 속으로 나동그라졌으며, 트럭은 날카로운 경적을 남긴 채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첨벙―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소리와 동시에, 하윤은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는데,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귓가에는 트럭의 잔향이 웅웅 울리고 있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흙탕물 위로 천천히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사인본이었다.
'안 돼……!'
하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이미 표지는 흙탕물에 완전히 젖어들어 잉크가 번지고 있었고, 작가의 정성스러운 서명은 마치 물 위에 그린 그림처럼 형체를 알 수 없이 뭉그러지며 흩어지고 있었으며, 그 검은 잉크가 갈색 흙탕물 속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하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윤의 눈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히 책 한 권을 망쳤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기다림, 새벽부터 발이 저리도록 서 있었던 그 하루,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향한 마음 전체가 함께 젖어버리는 것 같아서였고, 목이 뜨겁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하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필…… 하필 이걸.'
그런데 그때, 옆에서 함께 넘어졌던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흙탕물 위에 떠오른 사인본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설마."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하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의 무심함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있었는데, 파랗게 빛나던 두 눈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분노로 물들고 있었고, 그 눈빛의 변화가 어찌나 급작스러웠던지 하윤은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 내 서고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하윤은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서고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여자의 등 뒤로 무언가 하얗고 거대한 것이 순식간에 펼쳐지는 것이 시야 끝에 들어왔다.
그것이 날개였다는 사실을, 하윤은 뒤늦게, 완전히 젖은 채로 도로 위에 주저앉아 깨달았으며, 그 날개는 마치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얗고, 빛을 받을 때마다 미세하게 반짝이는 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는데, 사람의 몸에서 저런 것이 자라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 하윤은 이상하게도 놀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날개……? 저 사람, 사람이 아닌 거야?'
젖은 옷이 몸에 무겁게 달라붙은 채로, 하윤은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여자를 올려다볼 뿐이었고, 여자는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젖어버린 사인본과 하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시선 속에 담긴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인지 하윤으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신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지금의 하윤은, 그 기억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현실로 강제로 끌려 나오고 있었으며, 방금 전까지 회상 속에서 보았던 그 서늘한 눈동자가, 지금 자신의 앞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