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부터 하윤의 생활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신전과도 같던 방은 사실 다월의 거처였고, 그곳에는 신계와 인간계를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있어서 다월은 태연하게 인간계의 아파트 한 채를 빌려 두 사람이 함께 지낼 공간으로 삼았는데, 그 아파트의 인테리어는 온통 백합 문양과 은은한 백합 향으로 채워져 있어서 하윤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이 아직 저 신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백합 문양 벽지는 조명이 켜질 때마다 미묘하게 빛깔이 달라졌는데, 하윤은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저 값비싼 인테리어 소품인 줄로만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다월의 신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합의 여신이라 불리는 다월은 인간계에 머무는 동안에도 자신의 권능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고, 그 권능은 이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하윤의 일상을 은밀하게 지켜보는 눈처럼 작용하고 있었으니, 하윤으로서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체험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다월이 두꺼운 노트를 펼치며 말했는데, 그 노트에는 마치 시나리오처럼 세세하게 적힌 지시문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고, 하윤은 그 내용을 눈으로 훑어보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같은 반 친구와 우연히 손이 닿는 장면을 연출할 것.'
"이, 이걸 진짜로 하라고요?"
하윤이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월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건 백합 서사의 정석적인 클리셰니까."
담담한 확신에 하윤은 순간 말을 잃었는데, 그 순간 다월이 손끝으로 하윤의 뺨을 슬쩍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고, 그 손끝의 서늘한 온도에 하윤의 심장이 이상하게 쿵, 하고 뛰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하윤은 얼른 시선을 피했지만, 다월은 그런 하윤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네. 이 정도면 훌륭한 소재가 되겠어."
"소재라니, 저는 사람이라고요, 소재가 아니라!"
하윤이 항변했지만 다월은 그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갔는데, 그 필체가 지나치게 유려하고 아름다워서 하윤은 순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펜을 쥔 다월의 손가락은 마치 조각가가 다듬어 놓은 듯 매끄러웠고,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조차 우아해서, 사각사각.
그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채우는 동안 하윤은 문득 자신이 지금 어떤 존재와 마주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자각했다. 신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들 중 하나이자,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유독 애틋하고 은밀한 사랑의 형태를 관장한다는 백합의 여신. 그 존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인간계의 노트에 인간의 필기구로 무언가를 적고 있다는 사실이, 하윤에게는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다월은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윤은 문득 처음 신전에서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무섭고 낯설었는데……'
그날,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하윤의 앞으로 다월이 걸어왔었다. 걸음마다 백합 향이 짙게 번져 나갔고, 그 향은 마치 하윤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처럼 짙고 무거웠다. 다월의 은발은 달빛을 그대로 풀어놓은 듯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는 가을 하늘보다도 더 깊고 서늘한 빛을 담고 있었다. 그때 다월은 하윤을 내려다보며 말했었다.
"네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줄 아이구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하윤은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뿐이었는데, 지금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하윤은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때처럼 무섭지가 않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하윤은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진행할 거야."
다월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 목소리에는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본격적으로라니, 뭘요."
하윤의 물음에 다월은 천천히 몸을 돌려 하윤을 바라보았는데, 그 파란 눈동자 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훨씬 더 짙고 은밀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네가 좋아하던 그 사인본 작가, 한이나가 쓴 이야기 중에 딱 이런 설정이 있었지."
다월은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하윤의 손목, 검붉게 남은 백합 문양을 슬쩍 짚었는데, 그 순간 문양이 다시 한번 뜨겁게 반응하며 열기를 뿜어냈다.
하윤은 그 열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팔목을 따라 번지는 뜨거움은 마치 낙인이 새로 찍히는 것 같은 통증을 동반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다기보다는 저릿한 감각이 먼저였다. 이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월은 아직 명확히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다만 계약이 성립되는 순간 새겨졌다는 것, 그리고 이 문양이 붉게 빛날 때마다 다월의 권능이 하윤의 몸을 관통하며 이야기의 일부로 끌어들인다는 것 정도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여자가 서로의 운명에 얽혀드는 이야기, 그것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계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마치 자신의 앞날이 이미 다월의 손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짜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거, 저랑 여신님이랑……."
말을 끝맺지 못한 하윤의 앞에서, 다월은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웃음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입꼬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눈매 깊숙한 곳에는 하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갈망이 스쳐 지나갔고, 그것을 알아챈 하윤의 심장은 다시 한번 이상한 박동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럼 대답은 정해진 거네."
다월이 창가에서 걸어와 하윤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백합 향이 순식간에 짙어졌고, 하윤은 그 향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등 뒤로 곧 벽이 닿았다.
"이, 잠깐만요, 아직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
"대답은 필요 없어. 이미 시작된 이야기니까."
다월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하윤의 뺨을 스쳤고, 그 순간 문양이 세 번째로 뜨겁게 타올랐다. 하윤은 자신의 손목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제는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려는 거야.'
대답 없는 질문만이 하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창밖의 해는 완전히 저물어 방 안을 어둠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