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러고 보니…….'
흙탕물에 젖은 채로 도로 위에 주저앉아 있던 하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지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빗물에 젖은 바지 밑단이 다리에 척척 감기고, 손바닥에는 아스팔트에 긁힌 상처가 따갑게 남아 있었는데도, 그 모든 감각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자의 등 뒤로 펼쳐진 새하얀 날개였다. 마치 방금 세탁을 마친 이불처럼 결이 곱고 새하얀 그 날개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하윤은 그것이 조명 효과인지 아니면 정말로 날개 자체가 빛을 내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저게…… 진짜 날개라고?'
머릿속에서 의문이 소용돌이쳤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은 지금껏 하윤이 봐온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갈했는데, 젖은 은발이 이마에 흘러내려 있는 모습마저도 마치 계산된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 아래로 자리한 눈동자는 짙은 파란빛을 띠고 있어서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했다. 하윤은 그 눈동자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도무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뭐, 뭐예요, 그거……"
간신히 뱉어낸 물음에 여자는 대답 대신 물웅덩이 속에서 사인본을 건져 올렸다. 좀 전까지 하윤이 그 사인본을 구하겠다고 도로 한복판까지 뛰어들었던 것이 떠올랐는데, 마침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던 트럭 앞으로 튕겨 나가려던 그 책을 낚아채려다 균형을 잃고 웅덩이에 처박힌 것이 바로 이 순간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하윤으로서는 그 책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던 것인데, 막상 여자의 손에 들린 표지를 보니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잉크가 번져 있었고, 여자의 손끝이 그 위를 스칠 때마다 안타까움이 아니라 냉기가 서린 분노가 짙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한이나의 것이었지. 신계의 서고에서 유출된, 몇 안 되는 인간계의 명작."
그 말을 하윤이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여자, 다월은 젖은 사인본을 하윤의 눈앞에 들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신계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하윤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들어본 적 있는 전설의 한 조각이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감각이었다.
"네가 이걸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겠지."
순간 하윤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 말투에는 협박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재판정에서 판결문을 읽는 판사처럼, 다월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냥 위험해서 구하려고……"
"결과가 이런데 이유가 뭐가 중요해?"
다월의 말에 하윤은 순간 말을 잃었는데, 그 냉소적인 어조 안에는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억울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그것을 항변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하윤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럼 그냥 트럭에 깔리게 놔뒀어야 했다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반문했지만, 차마 그 말을 그대로 뱉어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신계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도 원래는 금기지만, 넌 이미 이 책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버렸으니 상관없겠지."
다월은 그렇게 말하며 손끝을 하윤의 손목에 가져다 댔고, 그 순간 화끈, 하는 열기가 손목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으윽……!"
하윤이 통증에 몸을 웅크리는 사이, 손목 위로 검붉은 백합 문양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살갗 아래에서 누군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감각이었는데, 그 붓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뜨겁고 아릿한 통증이 뒤따랐고, 하윤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마 손목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건 계약의 아자다. 네가 이 문양을 지니고 있는 동안, 넌 절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다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하윤은 통증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다월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이 여전히 다월의 은발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마치 하윤의 시간을 재는 초침처럼 느껴졌다.
"무, 무슨 소리예요, 돌아갈 수 없다니……!"
목소리가 갈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저 낯선 존재를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에 그쳤던 감정이, 이제는 명백한 공포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가 만든 백합극, 즉 백합 로맨스 체험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넌 인간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담담하게 흘러나온 그 선언에 하윤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이 낯선 존재의 손에 쥐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였다. 백합극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맨스 체험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는지 하윤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단어들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불길한 예감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갑자기 이런 걸……!"
애원 섞인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다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 미소는 결코 다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마치 발밑에서 파닥거리는 벌레를 구경하는 사람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조건을 어기면, 아까 느낀 그 통증이 이보다 몇 배는 심하게 찾아올 거야."
그 말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감싸 안았는데, 방금 느낀 화끈거림이 다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감추려고 애써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건 진짜야…… 진짜로 나를 가둔 거야, 이 사람이……'
확신에 가까운 절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사이, 하윤은 자신이 지금 이 낯선 존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워갈 무렵, 다월은 몸을 낮춰 하윤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앞으로 네가 겪을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계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 거야."
그 말에 하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다월의 파란 눈동자가 마치 모든 반항을 미리 예상한 듯 태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간신히 짜낸 물음에 다월은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손목의 문양을 손끝으로 가볍게 튕겼고,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하윤의 몸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크게 튀어 올랐다.
"흡……!"
그 반응을 지켜보던 다월의 입가에서 옅은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조금은 차가운 무표정이 자리를 잡았다.
"싫다고 해도 이미 새겨진 계약은 지워지지 않아. 이제부터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 조건을 최대한 빨리 완수해서 벗어나는 것뿐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윤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고, 빗물에 젖은 도로 위에 주저앉은 채로 그녀는 그저 손목의 문양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