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깨진 약속, 눈꽃이 피다

1화

궁정의 대전각은 겨울 햇살이 스며드는데도 서늘했다. 서지안은 그 서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등 뒤로 수백 명의 시선이 꽂혔고, 그 시선들은 하나같이 동정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이럴 리가 없다.'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서지안. 그대는 황실의 여인을 독으로 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이 자리에 섰다." 황태자 강도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그의 옆에 선 한소이 남작 영애는 손수건을 쥔 채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눈물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전하, 저는 결코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서지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이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너무나 확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조사도 없었고, 심문도 없었다. 그저 소문이 사실로 굳어지는 과정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증거가 명확하다." 강도윤이 짧게 말했다. 그 말투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자의 무관심이 배어 있었다. 서지안은 그 눈을 마주 보았다. 한때는 저 눈이 다정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낯선 사람의 것이었다. "그대와의 혼약을 파기한다. 그리고 그대는 대현제국의 국경 밖으로 추방될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대전각 안이 잠시 술렁였다. 혼약 파기까지는 예상했던 이들도, 추방이라는 말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벌어지긴 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같은 시각, 북천의 변경백 이현우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급보를 받고 있었다. "서 공작가의 영애가 혼약 파기와 함께 추방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고를 전한 부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현우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고, 붓끝에서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종이 위에 검은 점을 남겼다. "근거가 뭔가." "한소이 남작 영애의 증언이 유일한 근거입니다. 물증은 없습니다." 이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방은 조용했지만, 그 침묵은 폭풍 전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물증도 없이 추방형이라니." 그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북쪽의 눈은 여전히 두껍게 쌓여 있었고, 바람은 매섭게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안이.' 오래전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스쳤다. 여덟 살의 그녀가 눈밭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운 것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날의 기억은 짧았지만 선명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지금, 그가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지금 수도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부관이 놀라 물었다. 변경백이 정치적 사안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황태자의 결정에 반하는 개입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래." 이현우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 서지안은 자신의 처소로 끌려가듯 돌아가는 동안, 무릎이 후들거려 몇 번이나 멈춰 서야 했다. 시녀들도 이미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작 영애였던 그녀는, 오늘은 죄인이었다. '추방이라니.' 서지안은 침상에 걸터앉아 두 손을 모았다. 두려움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서 공작이 이 소식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서 공작은 그 시각, 이미 대전각 앞에서 강도윤에게 결투를 청하고 있었다. 늙은 신하 몇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검집에 손을 얹은 채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증거도 없이 제 딸을 추방하신다는 것이 말이 되는 처사입니까!" 강도윤은 그런 서 공작을 냉랭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공작의 심정은 이해하나, 이미 결정된 일이오." 결정된 일. 그 말이 서 공작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처음부터 짜인 함정이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을 뽑는다 해도, 상대는 황태자였다. *** 그날 밤, 서지안은 처소에 홀로 앉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열여덟 살에 정해진 혼약이 파기되고, 곧 추방까지 당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십 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처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서지안 영애, 손님이 오셨습니다." 밤늦게 손님이라니. 서지안은 의아함을 느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 지금 그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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