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깨진 약속, 눈꽃이 피다

2화

이현우가 그녀의 처소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궁 안에 퍼졌다. 궁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다시 내관들의 귀를 거쳐, 결국은 태자궁 깊숙한 곳까지 소문이 흘러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변경백이, 그것도 제국군의 오분의 일을 지휘하는 선제후가 한밤중에 죄인의 처소를 찾았다는 것은 결코 조용히 지나갈 사건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경비병들이 뛰쳐나와 그를 막아설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현우는 그 소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를 막을 만한 자가 이 궁 안에 몇이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오랜만이군, 서지안 영애."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담담했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인사였지만, 서지안은 그 목소리에서 오래된 기억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그 낮은 음성이었다. "변경백님이 어찌 여기까지…"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죄인의 처지로 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초라한 처소, 벗겨진 신분, 감히 눈도 마주치기 힘든 몰락. 그런 모습을 하필 이 사람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펐다. "네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이현우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 속에는 하루 만에 수도까지 달려온 자의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옷자락 끝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장화 밑창은 갈라진 흔적이 선명했다. 말을 몇 마리나 갈아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두 사람의 인연은 십 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지안이 여덟 살이었던 어느 겨울, 서 공작가와 이현우의 가문은 잠시 교류가 있었다. 그때 이현우는 아홉 살이었고, 이미 부모를 여읜 채 가문의 어린 당주로 지내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했던 소년이었다는 것이 당시 어른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날 서지안은 눈밭에서 미끄러져 넘어졌고, 발목을 다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홀로 앉아 있었다. 시종들도, 유모도 모두 다른 곳으로 흩어져 그녀가 넘어진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발목은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눈은 계속 내렸다. 그날의 추위는 서지안의 기억 속에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이현우였다. "울지 마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의 몸짓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등에 업어 저택까지 데려다주었다. 눈이 쌓인 언덕길을, 아홉 살짜리 소년이 여덟 살짜리 소녀를 업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의 서지안은 알지 못했다. 다만 등에서 느껴지던 온기만은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 짧은 하루의 기억은, 서지안에게 오랫동안 마음속 한켠에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가문의 교류는 뜸해졌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했다. 서지안은 황태자의 혼약녀가 되었고, 이현우는 북쪽 변경을 지키는 선제후가 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은혜를 아직 갚지 못했는데.' 이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궁을 향해 말을 몰았던 것이었다. 그가 변경의 소식통으로부터 서지안의 추방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불과 나흘 전이었다. 그날로 그는 지휘권을 부관에게 넘기고 곧장 말을 몰았다. 국경을 지키는 자가 임지를 비우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 "네 처지를 들었다. 추방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 처사다." 이현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서지안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감당해야 할 죄입니다." "죄가 아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단호함에 서지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죄인이 된 이후로 이토록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해 준 사람은 없었다.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이런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전하의 결정을 되돌릴 방법이 있습니까?" 서지안이 물었다. 이미 여러 번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오라비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도 던져 보았던 질문이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방법이 없다는 것. 그러나 이번엔 상대가 달랐다. "방법이 있다." 이현우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 뒤에 숨겨진 무게는, 서지안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확신과 함께, 그녀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무언가가 함께 담겨 있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서지안은 답답했지만, 그 이상 캐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선제후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을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 다음 날, 이현우는 황궁의 법무성을 찾아갔다. 선제후의 자격으로, 그는 이번 사건의 재심을 요청했다. 물증 없는 추방형은 대현제국의 법률에도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법무성의 관리는 이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변경백이 직접 이곳까지 걸음을 할 이유가 무엇인지, 그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변경백께서 직접 나서실 사안은 아닙니다만." 법무성의 관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투엔 은근한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소." 이현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준비해 온 서류를 관리 앞에 내려놓았다. 그 서류에는 대현제국의 옛 법전 조항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물증 없는 중죄 판결은 무효로 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관리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오래된 것이었지만, 필체는 최근에 쓰인 것처럼 또렷했다. 이현우가 이 조항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옛 법전을 뒤졌다는 사실을, 이 관리는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그 서류를 훑어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재심을 청하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전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관리의 말끝이 흐려졌다. 감히 황태자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서도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게 만들 것이오." 이현우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의 대가가 무엇인지, 이 순간의 그는 아직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가 법무성의 문을 나서는 순간, 이미 궁 안 어딘가에서는 이 소식이 황태자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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