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현우의 재심 요청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법전의 조항이 명백했고, 다른 선제후들 역시 물증 없는 판결에 우려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강도윤은 마지못해 한 걸음 물러섰다.
대전각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선제후들의 시선이 강도윤과 이현우 사이를 오갔다.
"추방형은 철회한다. 다만 서지안은 근신형에 처한다."
대전각에서 다시 열린 심리에서, 강도윤은 그렇게 선언했다. 목소리엔 여전히 냉랭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 뒤엔 감출 수 없는 불편함도 섞여 있었다.
'추방보다는 나은 판결이다.'
서지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근신형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도윤의 다음 말이 그녀의 안도를 도로 거둬들였다.
"근신은 북천의 변경백 영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변경백이 직접 감시와 책임을 맡도록 하지."
그 선고에 대전각이 다시 술렁였다. 근신형이라는 것 자체는 관대한 처분이었지만, 그것을 하필 이현우의 영지에서 집행하도록 한 것은 강도윤 나름의 의도가 담긴 결정이었다.
몇몇 선제후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변경백에게 책임을 지우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두 사람을 한 지붕 아래 놓아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읽어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변경백이 나서서 살렸으니, 변경백이 책임지라는 뜻인가.'
서지안은 그 결정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과, 이 결정이 이현우에게 어떤 부담을 지울지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현우 쪽을 슬쩍 돌아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
심리가 끝난 뒤, 서 공작은 이현우를 찾아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전각을 나서는 복도, 아직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채 사라지지 않은 그곳에서였다.
"변경백,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서 공작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때는 제국에서 손꼽히던 가문의 수장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딸의 목숨을 구걸하듯 지켜본 늙은 아비의 얼굴이었다.
"공작, 고개를 드십시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서 공작은 그 담담함 속에 숨겨진 무게를 놓치지 않았다.
"변경백께서 이 일로 입지가 흔들리실까 걱정이오. 북천의 병력이 제국군에 비해 얼마나 미미한지는 저도 잘 알고 있소. 그런데도 전하의 뜻을 거스르고 나서 주셨으니……."
서 공작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더 말을 이어가면 목이 메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현우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알면서, 괜찮다는 말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그날 밤, 이현우의 측근인 노장군 하선이 그를 찾아왔다. 처소의 등불이 낮게 흔들리고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겨울바람이 스산하게 지나갔다.
"변경백님, 이번 일로 강도윤 전하가 크게 불편해하실 겁니다."
"알고 있소."
이현우는 짧게 답했다. 하선은 그 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더 좁혔다.
"선제후 중 몇몇도 이번 개입을 곱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서 공작가는 이미 힘을 잃은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여식을 지키려 황실의 뜻에 반하다니요."
하선의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이현우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북천의 병력을 지휘하는 것만으로도 전하께서는 이미 변경백님을 견제하고 계십니다. 이번 일이 그 견제에 명분을 더해 줄 뿐입니다."
하선은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제국 중앙의 눈은 늘 북천을 향해 있습니다. 병력의 규모, 재정 상태, 심지어 변경백님의 사소한 언동까지도 보고가 올라갑니다. 이번 일로 그 보고서의 분량이 몇 배는 늘어날 겁니다."
이현우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등불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었소."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하선이 물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이현우를 곁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판단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이현우는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 눈밭에서 울고 있던 작은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녀가 자라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켜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에 잠시 옛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하선이 알지 못하는, 이현우 혼자만이 간직해온 기억이었다.
"빚이 있소."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하선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무게가 어떤 질문으로도 가벼워지지 않을 것임을, 오랜 시간 그를 섬겨온 노장군은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
한편 강도윤은 자신의 처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잔에 담긴 술은 이미 절반이 비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대전각의 심리 기록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변경백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나서는 거지."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서지안을 향한 미련이라기보다는, 이현우가 자신의 결정을 뒤엎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술잔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방 안에 울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소이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전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변경백이 손을 뻗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강도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북천의 병력이 제국군의 오분의 일이라 했나. 그런 자가 서지안을 지키겠다고 나섰으니… 이건 단순한 동정이 아닐 수도 있겠군."
강도윤은 술잔을 다시 채우며 혼자 되뇌듯 말을 이었다.
"그 정도 병력으로 감히 황실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뒤에 뭔가 더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거나."
한소이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자신에게 어떤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강도윤의 잔에 술을 따르며 표정을 관리했다. 겉으로는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 변경백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지켜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강도윤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잔을 든 손이 이전보다 조금 더 세게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궁정 안 곳곳에서, 이 사건을 둘러싼 소문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변경백이 오래전부터 서지안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수군거렸고, 또 누군가는 그가 서 공작가와 은밀한 거래를 맺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오직 두 사람, 이현우와 서지안뿐이었지만, 그 진실조차 아직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