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깨진 약속, 눈꽃이 피다

4화

북천으로의 출발을 앞둔 서지안의 처소는 이삿짐으로 가득했다. 많지 않은 짐이었다. 공작가 영애로서 지녔던 대부분의 물건은 이번 사건으로 압류되거나 처분되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들이 놓여 있던 화장대는 텅 비어 있었고, 옷장 속에는 몇 벌의 평범한 옷가지만이 걸려 있었다. 서지안은 남은 몇 개의 상자를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내 전부구나.' 한때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던 것들이, 이제는 상자 세 개에 다 들어갔다. 서지안은 그 사실이 서럽다기보다는 차라리 우스웠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이렇게 적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배운 셈이었다. 그때 시녀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애님, 서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서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서 공작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딸을 끌어안았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아버지." 서지안은 애써 밝게 웃어 보였지만, 서 공작의 표정은 무거웠다. 딸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변경백에게 큰 신세를 졌구나. 그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그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서지안은 그 말에 표정이 굳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아버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무게가 더욱 실감되었다. 방 안의 상자들이 갑자기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제가 짐이 되지 않을까요." "짐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지.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서 공작의 말에 서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에서는 다른 걱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변경백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정확히 무엇을 감당하려 하는 것인지, 그녀는 아직 다 알지 못했다. 서 공작은 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출발일 아침, 이현우가 직접 마차를 준비해 그녀를 데리러 왔다. 마차는 화려하지 않았다. 문장(紋章)조차 새겨지지 않은 수수한 검은색 마차였는데, 그 점이 오히려 서지안의 마음을 놓게 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배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채비는 다 끝났습니까." "네, 변경백님." 서지안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현우는 그 인사를 받으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엔 십 년 전과는 다른 그늘이 있었다. 이현우는 상자들을 힐끗 보았다. 세 개뿐인 짐을 보고도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하인에게 짐을 옮기라 짧게 지시했을 뿐이었다. "가는 길이 멀 겁니다. 각오하십시오." "각오는 이미 했습니다." 서지안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이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럼 됐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궁을 벗어나 성문을 지나는 동안, 서지안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늘 지나던 시장 골목이, 어릴 적 유모의 손을 잡고 걷던 정원의 담벼락이, 이제는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녀는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다. *** 마차가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평원으로 들어섰을 무렵, 이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무엇을요?" "이 모든 일에 휘말린 것 말입니다." 서지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풀밭이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말을 멈췄다. '오히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을 그대로 내뱉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사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오히려 무엇입니까?" 이현우가 되물었다. 서지안은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오히려… 변경백님께 짐이 될까 걱정입니다." "짐이라니요." 이현우가 낮게 웃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잠시 가벼워지는 듯했다. "저는 스스로 선택해서 나선 일입니다. 짐이라 여긴 적은 없습니다." 그 말에 서지안의 가슴 한구석이 조용히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심장이 왜 이렇게 뛰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별일이다.' 그녀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 마차가 잠시 쉬어가기 위해 어느 작은 마을에 멈춰 섰을 때, 이현우는 마부에게 몇 마디를 지시하고 돌아왔다. 마을은 작고 조용했다. 지붕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우물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북천까지는 아직 여러 날이 남았습니다. 무리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지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현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다시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서지안은 그 침묵이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대신 마을 사람이 건네준 따뜻한 차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이현우는 마차 옆에 서서 지도를 펼쳐 들고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서지안은, 문득 저 사람이 자신을 위해 감당해야 할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 떠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 여정을 무사히 견디는 것 말고는.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창밖으로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붉은 빛이 평원을 가득 채우는 풍경 속에서, 서지안은 문득 이 여정이 끝난 뒤 자신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북천이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변경백의 영지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될까. 이현우는 맞은편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붉은 저녁빛이 유독 짙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밤, 마차가 지나온 길 뒤편에서, 낯선 자의 시선이 그들을 조용히 뒤쫓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말을 탄 그 시선의 주인은 마차가 멈출 때마다 함께 멈추었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면 다시 뒤를 따랐다. 결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저 어둠 속에서,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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