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검 끝이 내 손끝에 닿기도 전, 신전 바닥 전체가 진동했다.
쿠구구.
발밑이 흔들렸다. 마흔둘 평생 지진 한번 겪어본 적 없는 나로선 이게 얼마나 큰 규모인지 가늠도 안 됐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게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것.
도현이 재빨리 검을 거두고 나를 뒤로 밀었다. 어깨를 잡는 손이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힘이 세면서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손짓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 남자는 내 팔뚝에 멍 하나 안 남기려고 애쓰고 있었다. 신이 다치면 곤란한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인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뭔가 반응했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처음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지 모르겠다. 도현도 처음, 나도 처음, 이 상황 자체도 다 처음. 다섯 번의 멸망을 겪었다는 세계가 이렇게 매번 새로울 수가 있나 싶었지만,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했다.
신전 중앙, 금이 간 바닥 아래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엔 실금 같았던 게 점점 넓어지더니, 곧 사람 서너 명이 서 있을 만한 크기의 원이 됐다.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쪽에 가까웠다. 형광등 불빛도 아니고, 촛불도 아니고, 그 중간 어디쯍의 흰빛이었다. 원 안에서 형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람 모양이었지만 반투명했다. 다섯. 여섯. 일곱. 셀 수 있는 만큼 늘어났다. 마치 물속에서 올라오는 그림자 같았다. 윤곽이 먼저 잡히고, 그 다음에 색이 스며들고, 마지막에 표정이 완성되는 순서였다.
"신의 자녀들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임무 중이었는데, 강제로 소환된 것 같습니다."
강제 소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임무 중에 아무 예고 없이 끌려온 거라면, 저쪽에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던 일이 그대로 멈춘 채일 거다. 회사 다닐 때 회의 중에 불려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뭔가 더 심각한 종류의 방해 같았다.
형체들이 점점 또렷해졌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여자애 하나, 나보다 조금 나이 든 것 같은 남자, 노인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 사이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여자와, 수도자처럼 소박한 옷을 걸친 남자, 어딘가 사무직처럼 보이는 안경 쓴 여자도 있었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일곱 쌍의 눈이 동시에 나를 향하는 건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경험이었다. 면접장에 혼자 앉아 일곱 명의 면접관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이번엔 내가 채점당하는 입장인지, 채점하는 입장인지도 헷갈렸다.
"...새 신이야?" 어린아이 쪽이 물었다. 목소리가 앳됐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안심한 얼굴이었고, 어떤 이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안경 쓴 여자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관찰하듯 쳐다봤는데, 그 시선이 제일 부담스러웠다. 갑옷 입은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고, 노인처럼 보이는 이는 그냥 한숨을 쉬었다.
"다섯 번째는 사기꾼이었지." 그가 말했다. "우리가 또 속아야 하나?"
사기꾼이라는 단어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섯 번째 신이라는 사람이 이들에게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로 이 신전 안 공기가 왜 이렇게 서늘한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확인은 이미 됐습니다." 도현이 대신 대답했다. "신전이 반응했습니다."
"신전이 반응하는 것과 진짜 도움이 되는 건 다른 얘기지." 노인이 팔짱을 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근거도 없었고, 반박한다고 해서 저 노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것 같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을 하나씩 훑어봤다. 총 일곱이었다. 도현까지 합치면 여덟. 이게 다섯 번의 멸망을 지나 남은 신의 자녀 전체라면, 생각보다 적었다.
여덟 명으로 뭘 어떻게 굴려야 하나. 사업체를 하나 맡았는데 직원이 여덟 명이고, 그중 절반은 신임 사장을 의심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 나쁘게 말하면 이건 노동조합과의 첫 상견례 같은 그림이었다.
"원래는 몇 명이었어요?" 내가 물었다.
순간 신전 안이 조용해졌다. 어린아이 쪽이 시선을 내렸다. 도현도 말이 없었다. 갑옷 입은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안경 쓴 여자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노인만이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 이전과는 다른 뭔가가 섞여 있었다. 경계심이 아니라 슬픔 비슷한 것.
"많았습니다." 결국 도현이 대답했다. "지금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 말투에서 뭔가가 걸렸다. 그냥 숫자가 줄었다는 게 아니라, 줄어든 이유가 무거운 종류라는 느낌이었다. 다섯 번의 멸망이라는 말이 그냥 숫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몸으로 느꼈다. 매번 멸망을 지날 때마다 자녀들도 함께 사라졌을 거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일곱은 그 다섯 번의 파도를 다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첫날부터 남의 상처를 후벼 팔 이유는 없었다.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아니었다.
"좋아요." 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규칙을 좀 정하죠."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신이 규칙을 정한다고?"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정하는 걸 제가 듣는 거예요." 나는 정정했다. "저는 여기 규칙을 하나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몇몇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다섯 번째 신이 자기 규칙을 강요했었나 보다, 짐작이 갔다. 아마 그 사기꾼 신이라는 사람은 오자마자 이래라 저래라 지시부터 내렸을 거다. 그리고 그 지시가 결국 뭔가 잘못됐을 거고. 나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첫날부터.
"첫째," 어린아이 쪽이 손을 들었다. "임무 중엔 강제로 소환하지 마요. 위험했어요."
"미안해요. 이건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요."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둘째," 도현이 말을 이었다. "자녀들은 각자 임무 지역이 있습니다. 함부로 이동시키면 그쪽 균형이 무너집니다."
"셋째," 노인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믿는 데는 시간이 걸려. 신이라고 해서 바로 믿어주진 않을 거야."
"그건 당연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믿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넷째," 갑옷 입은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위험 지역엔 우리끼리 판단해서 들어갑니다. 신이 직접 지시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제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면, 제 역할이 뭐가 되는 거예요?"
"조율." 안경 쓴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지시가 아니라 조율입니다. 우리가 각자 판단한 걸 모아서, 균형을 잡는 역할. 그게 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조율이라는 말이 묘하게 익숙했다. 부서마다 알아서 굴러가는데, 그 사이에서 마찰이 안 나게 조정만 해주는 역할. 회사 다닐 때 딱 그런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자리였다.
하나씩 규칙이 쌓였다. 실무적인 내용도 있었다. 임무 지역별 보고 체계, 힘이 약해질 때의 신호, 위험 지역 표시 방식 같은 것들. 듣고 있으니 이건 어디서 본 것 같은 구조였다. 사업체 관리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력 배치, 위험 지역 분류, 응급 대응 체계─마흔둘까지 살면서 회사 생활도 좀 해본 나로선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다.
"보고는 어떻게 해요?" 내가 물었다. "제가 여기 계속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신전에 오시면 됩니다." 도현이 답했다. "신전이 자녀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반영합니다. 위급한 경우엔... 방금처럼, 신전이 직접 반응합니다."
"방금처럼 강제 소환도 되고요?" 어린아이 쪽이 살짝 눌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 신전 시스템 문제인 것 같은데요." 나는 억울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저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어요."
"신전 시스템이 아니라 당신 힘이 처음 반응한 거였습니다." 도현이 정정했다. "당신이 검에 손을 대려던 순간, 신전이 자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마... 확인하려던 것 같습니다."
확인.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신전이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녀들이 나를 봐야 한다고 신전이 판단한 건가. 어느 쪽이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럼 저도 하나 물어볼게요." 나는 다들 말을 마친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뭐예요? 신이라고는 하는데, 아직 저는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다들 서로를 쳐다봤다. 답을 아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노인이 미간을 좁혔고, 갑옷 입은 여자는 고개를 살짝 저었고, 안경 쓴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다섯 번째 신은 처음부터 힘을 썼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
그 말이 왠지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아무것도 안 썼다는 건, 아직 뭐가 있는지 나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상자를 받았는데 뭐가 들었는지 확인 안 하고 여태 방치해둔 셈이었다.
"그럼 확인해봐야겠네요." 나는 말했다. "아까 하려던 거, 계속해요."
도현이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검을 뽑았다. 이번엔 자녀들도 지켜보는 앞이었다. 일곱 쌍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꽂혔다. 아까보다 더 부담스러웠다. 이번엔 진짜로 뭔가 확인되는 순간이니까.
검이 뽑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챙.
그 소리 하나에 신전 안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도현의 손이 흔들림 없이 검을 들었다. 이번엔 신전이 반응하지 않았다. 조용했다. 다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지 자세를 낮췄다.
검 끝이 내 손끝에 닿았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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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빛 속에서, 나는 뭔가를 봤다. 정확히는 느꼈다. 내 안쪽 어딘가에, 조각조각 나뉜 뭔가가 있었다. 유리처럼 예리한 모양들이었다. 만지면 베일 것 같은데, 만지지 않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일지도 몰랐다. 크기도 제각각이었고, 색도 조금씩 달랐다. 어떤 조각은 투명했고, 어떤 조각은 흐릿한 회색이었고, 어떤 조각은 유난히 밝게 빛났다. 저게 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것들이 지금 내 안에 있다는 것.
영조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조심하십시오. 조각난 영혼은 나눠줄 때마다 아플 겁니다.
그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눠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조각들이 그것과 관련 있다는 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손끝으로 조각 하나를 건드렸다.
닿는 순간 느껴진 건 차가움이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냉기가 손끝에서 시작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대로, 세상이 조여드는 듯한 통증이 왔다.
숨이 막혔다. 눈앞의 하얀 빛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도현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몸이 반으로 접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접힌 건 아닐 거다. 그런데도 감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뼈 하나하나가 뒤틀리는 것 같았고, 그 뒤틀림 사이로 뭔가가 새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뭔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