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통증은 짧았다. 대신 깊었다.
칼로 살을 베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오래된 상처를 갑자기 다시 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년 전에 아문 자리를, 누가 손톱으로 억지로 뜯어내는 감각. 마취 없이 실밥을 뽑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통증 사이로 잠깐 끼어들었다. 나는 신음도 내지 못하고 그냥 무릎을 꿇었다. 무릎뼈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퍽.
"설아 님!" 도현이 검을 던지고 나를 잡았다.
손끝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톱 밑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빛이었다. 조각 하나가 실제로 떨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그 빛이 스르륵 흘러나와 도현의 손등으로 옮겨갔다. 마치 실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방향이 정해진 움직임이었다.
"이게..." 도현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빛이 살갗 아래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손등에 잠깐 옅은 자국이 남았다가, 그것도 곧 지워졌다.
순간 도현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검은색이었던 눈이 잠깐 은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 깜빡할 사이였다. 놓쳤다면 못 봤을 정도로.
"힘이... 느껴집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놀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도현답지 않게 말끝이 흔들렸다.
주변에 있던 신의 자녀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누군가는 뒷걸음질을 쳤고, 누군가는 오히려 한 발 다가섰다.
"조각을 나눠주는 거였어." 노인이 중얼거렸다. "들어본 적 있어. 초창기 신들이 그렇게 힘을 나눠줬다고. 옛날 얘기에나 나오는 방식인데."
"초창기?" 옆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중에 준서라고 알게 될 사람이었다. "그거 완전 옛날 방식이잖아요. 지금도 그게 됩니까?"
"몰라." 노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됐으니까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거지."
"괜찮아요?" 어린아이 쪽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중에 유리라고 알게 될 아이였다. 조그만 손이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괜찮아요." 나는 대답했다.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았다. 몸 안쪽에 뭔가가 빠져나간 자리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뻥 뚫린 자리에 찬바람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걸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첫날부터 걱정거리를 늘릴 이유는 없었다. 이런 데서까지 보호자 노릇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몸이 먼저 그렇게 움직였다.
"다시는 이렇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 도현이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존댓말인데 어딘가 명령조였다. "당신 몸이 상합니다."
"제 몸은 원래 상해 있었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는데, 도현은 웃지 않았다.
"그런 말투, 별로입니다."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이 무뚝뚝한 애가 이런 식으로 정색할 줄은 몰랐다. 소연이었을 때, 나는 늘 내 상태를 가볍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파도 괜찮다고, 힘들어도 별거 아니라고. 누가 물으면 늘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습관이 됐다는 걸, 죽어서 다른 몸으로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못 고쳤다는 걸, 도현이 지금 지적해준 셈이었다. 이상한 애다. 처음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걸 짚어내는 건지.
"...미안해요." 나는 작게 말했다.
도현은 대답 없이 나를 부축해 신전 계단 옆 돌의자에 앉혔다. 돌은 차가웠다. 해가 지고 있었는지,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른 자녀들이 조심스레 주변에 모였다. 발소리들이 겹치며 잦아들었다.
"이게 원래 신이 하는 일이야?" 유리가 물었다.
"몰라." 강이 대답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몇백 년 살았어도 처음 보는 건 여전히 나와."
"몇백 년이요?" 나는 그 노인을, 이제는 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그 노인을 다시 훑어봤다. 겉모습은 스무 살쯘 되어 보이는데, 이름과 말투는 완전히 다른 세대 같았다. 이름과 외양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어봤다가 감당 못 할 대답이 나올까 봐 겁이 났다.
"조각을 나눠줄수록," 도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약해지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방금 느낀 걸로 짐작하자면, 뭔가를 내줄 때마다 몸 안쪽에서 뭔가가 줄어드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통장에서 이자가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게 위험한 정도인지 아닌지는 아직 판단이 안 갔다.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빠지는 셈이니까, 어떻게 보면 더 무서운 구조였다.
"아마도요."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렇다고 안 나눠줄 수는 없잖아요. 여러분이 힘이 있어야 임무를 하는 거니까요."
"당신 몸이 먼저입니다." 도현이 딱 잘라 말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제가 먼저 없어지면, 그것도 문제 아니에요?" 나는 되물었다.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그 표정이 재밌어서, 나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겉으로는 안 웃었다. 이런 애한테 놀리는 티를 내면 앞으로 계속 정색당할 것 같았다.
노인이 팔짱을 낀 채 나를 훑어봤다. "당신, 이상한 신이네."
"어떤 의미로요?"
"보통은 그런 걸 궁리 안 해. 그냥 받으라면 받는 거지, 자기 몸 챙기는 신은 처음 봐. 신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옛날 신들은 어땠어요?"
"쓸 수 있을 때까지 쓰고, 못 쓰게 되면 사라졌지. 그게 정상이었어."
정상. 그 단어가 마음에 오래 걸렸다. 이 세계에서는 그게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정상이 아닌 방식으로 여기 있는 셈이었다.
그 말에 나는 잠깐 웃음이 났다. 살아 있을 때, 나는 누군가를 챙기는 데는 익숙했지만 나 자신을 챙기는 건 늘 뒷전이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남 걱정을 하다가 정작 내 진료 순서는 놓치는 사람이었다. 그게 죽어서까지도 이어질 줄은 몰랐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 애들─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낯설고 조심스러운 이 존재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익숙한 감각이 올라왔다. 챙겨야 할 대상이 생겼다는 감각.
그건 오래 잊고 지낸 감각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에 새겨진 습관은 죽음도 못 지운 모양이었다.
"이름들, 다 알려줘요." 나는 말했다. "규칙만 정하고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어린아이 쪽이 먼저 대답했다. "저는 유리예요." 목소리가 야무졌다. 어린 외모와 안 어울리게 발음이 또박또박했다.
"저는 강." 노인이 대답했다. 여전히 이름과 외양이 안 맞았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나머지도 차례로 이름을 댔다.
"미현이에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팔짱을 끼고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여자였다. 말은 짧게 하고 눈으로 상황을 계속 살피는 타입 같았다.
"준서." 아까 끼어들었던 목소리였다. 웃는 낯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쯤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도현과 비슷한 결이었다. 무뚝뚝한 애들이 몇 명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현.
"기억할게요." 나는 하나씩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름들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몸속 조각들이 조용히 반응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원래 알던 이름이었던 것처럼.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가슴 안쪽이 살짝 울렸다. 종을 살짝 건드린 것처럼, 짧고 낮게.
"이제 임무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현이 자녀들을 향해 말했다. "소환은 오늘로 끝입니다."
그 말에 하나둘 빛이 옅어지며 사라졌다. 임무 지역으로 돌려보내지는 모양이었다. 유리가 사라지기 직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은 흔든 것도 아니고 안 흔든 것도 아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정도로 인사를 대신했다. 준서는 마지막까지 웃는 낯으로 사라졌고, 미현과 하람은 별말 없이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빛이 흐려지는 순서가 다들 제각각이었다. 사람마다 사라지는 속도까지 다르다는 게, 어쩐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도현이었다.
"당신은 왜 안 가요?" 내가 물었다.
"제 임무 지역은 여기 근처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근처라는 말이 어쩐지 편의적으로 들렸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당신을 지키는 것도 임무일 것 같아서요."
그 말이 어딘가 서툴렀다.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정한 임무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게 조금 고맙고, 조금 걱정스러웠다. 지켜주겠다는 말이 나쁘지 않았지만, 자기 몸도 못 챙기게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방금까지 내가 도현한테 들은 소리를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 몸이 먼저입니다, 라고.
"고마워요." 나는 짧게 말했다. 그 말 뒤에 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도현은 대답 없이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철컥, 소리가 짧게 났다. 그 손등에, 방금 받은 빛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못 알아챌 정도로 희미했지만, 나는 알았다. 저 안에 뭐가 들어갔는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나는 그 손을 잠깐 바라봤다. 저 안에 내 조각 하나가 들어 있다. 그게 이 애를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다면, 몸이 상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계산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계산을 그만두지 못했다.
다만 영조의 경고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눠줄 때마다 아플 거라는 그 말. 방금 겪은 통증이 시작일 뿐이라면, 앞으로 몇 번을 더 견뎌야 하는 걸까. 여섯 명이었다. 방금 도현 하나에게 조각을 나눠준 것만으로 이 정도인데, 나머지 다섯 명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계산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치 이자가 얼마나 붙는지도 모르고 대출을 받은 기분이었다. 갚을 날짜도, 갚을 방법도 모르는 채로.
바람이 신전 계단 사이로 훑고 지나갔다. 붉은 하늘이 점점 짙은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도현은 여전히 내 옆에 서 있었다. 말없이, 그냥 그 자리에.
그 답은, 며칠 뒤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