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별궁의 아침은 늘 똑같았다. 새 한 마리가 창턱에 앉았다가 날아가고, 시녀 하나가 조식을 들고 들어와 다과상을 정리하고, 나는 그 사이 침대에서 눈을 뜨며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겠구나 하고 안심하는, 그런 식이었다. 유폐라는 말이 붙어 있긴 했지만 실상은 요양이나 다름없었는데, 창살도 없고 감시도 형식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밥이 맛있었으니 나로서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이 정도면. 왕궁 한복판에서 손가락질받으며 살던 것보다는 백배 나았으니까.
가끔은 이 평화가 너무 완벽해서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별궁 정원의 나무들은 계절에 맞춰 알맞게 잎을 떨어뜨렸고, 시녀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했으며, 나는 그 규칙적인 흐름 속에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늙어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런데 그날 아침, 시녀가 들고 온 건 다과상이 아니라 봉투 하나였다. 붉은 인장이 찍힌, 딱 봐도 격식을 차린 그 봉투를 받아 든 순간 손끝이 살짝 떨렸는데, 이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나는 속으로 재빨리 자가진단을 내렸다. "영애님, 왕궁에서 온 서신입니다." 시녀가 조심스레 말했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온갖 불길한 예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인장을 뜯기 전에 봉투를 몇 번이나 뒤집어 봤다. 겉면에 적힌 글씨체는 사무적이고 딱딱했으며,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완벽함은 대체로 좋은 소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학습한 바 있었다. 봉투 하나 뜯는데 이렇게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건 또 얼마 만인가.
뜯어보니 내용은 간결했다. 사흘 내로 왕궁 복귀 여부를 답하라는 것이었다. 사흘. 나는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되읽으며 이게 무슨 뜻인지 곱씹었는데,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나를 공개 단죄하고 유폐까지 시킨 게 저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사흘 내로 돌아오라니. 이게 말이 되나.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한 줄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존칭은 과할 정도로 정중했지만, 그 정중함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 정중한 말투로 사람 목을 조르는 재주는 다들 어디서 배우는 걸까. 문장 어디에도 협박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사흘이라는 숫자 자체가 이미 협박이었다. 사흘 안에 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그 침묵이 나머지 문장들보다 더 크게 울렸다.
손이 떨렸다. 서신을 든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떨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텐데, 왜냐하면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하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전생에 이 나라를 배경으로 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플레이한 적이 있었고, 그 게임 속에서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몸, 선우아린이었으며, 그것도 악역 조연이었다. 왕태자에게 집착하다가 히로인을 괴롭히고 결국 공개 단죄당해 몰락하는, 딱 그 뻔한 서브 캐릭터.
그 사실을 깨달은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게 뭐 하는 개연성이야, 라고 속으로 욕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눈앞의 세계가 게임 속 그 세계와 지나치게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왕태자 이하준의 성격, 한소이라는 이름의 남작가 영애, 유하람이라는 어릴 적 친구까지. 전부 게임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처음엔 부정했다. 우연이겠지, 세상에 비슷한 이름은 얼마든지 있는 거고, 비슷한 성격도 얼마든지 있는 거니까. 그러다 이하준이 특정 대사를 정확히 그 타이밍에 내뱉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부정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대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본에서 몰락하기로 정해진 배역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했다. 원작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게,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치밀하게. 공개 단죄를 오히려 유리하게 이용하자는 계산까지 해서, 사람들 앞에서 굳이 강하게 반박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는 척했던 것도 다 내 그림이었다. 유폐? 오히려 반가웠다. 게임에서 벗어나 조용히 숨어 지낼 명분이 생겼으니까. 나는 그렇게 안심하고 별궁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던 거였다.
그동안 나는 매일 밤 원작의 흐름을 되짚었다. 어디까지가 내가 아는 전개고, 어디부터가 내가 만든 변수인지. 단죄 장면에서 내가 예상보다 얌전히 굴었던 것부터가 이미 큰 변수였을 텐데,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이상 신호가 없었다. 왕태자궁에서도 조용했고, 한소이 쪽에서도 아무 접촉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심했다. 게임이 끝났다고, 진짜로 끝났다고.
그런데 사흘 통첩이라니. 이게 뭐야, 이거 원작에 없던 전개잖아.
서신을 다시 읽었다. 발신인은 왕태자궁 소속의 문관이었고, 내용은 형식적이었지만 그 아래 깔린 압박감은 형식적이지 않았다. 복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적혀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협박의 여백이랄까. 나는 서신을 접어 서랍에 넣으며 창밖을 봤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잔잔했는데, 내 속만 태풍 전야처럼 들끓고 있었다.
서랍을 닫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불안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나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지금 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이름을 붙인다고 사흘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영애님, 무슨 일이신지요." 옆에서 지켜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별일 아니야."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게 별일이 아니면 뭐가 별일이냐, 하고 자문했다.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있었던 거였나. 그렇다면 지금 다시 재생 버튼이 눌린 건가.
시녀는 더 캐묻지 않고 물러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이상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존재인지 모른 채, 그냥 몰락한 귀족 영애를 성심껏 모시고 있을 뿐인데. 이 별궁이 무너지면 이 사람의 자리도 같이 무너질 텐데. 그런 생각까지 하니 사흘이라는 숫자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왜 하필 지금, 이라는 물음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단죄 이후 몇 달간 별궁에서 조용히 지냈고, 왕태자 쪽에서도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흘 안에 답을 하라니. 뭔가 급박한 사정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아직 그게 뭔지 몰랐지만, 몰라도 좋은 예감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게임 속 전개를 다시 떠올렸는데, 원작에서 왕태자 이하준은 단죄 이후 히로인 한소이와 순탄하게 이어지는 걸로 끝났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그 마지막 장면 이후에도 뭔가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속편이 있었나? 아니면 내가 뭔가를 놓친 건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그 이후의 전개는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 크레딧이 올라가고 엔딩 일러스트가 뜨는 장면에서 내 기억은 끊겨 있었다. 그 뒤에 무슨 DLC가 있었는지, 혹은 후일담 같은 게 있었는지, 전생의 나는 그 게임을 딱 한 번, 그것도 대충 훑어보듯 플레이했을 뿐이라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다. 하필 이런 데서 덕질을 게을리한 벌을 받는구나, 싶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답을 미루면 미룰수록 불리해질 게 뻔했다. 사흘. 나는 그 사흘 안에 정보를 모아야 했다. 왕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하필 나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는지. 그리고 그 정보를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하람. 그 이름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복잡해졌는데, 지금은 그런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시녀를 불러 은밀히 서신을 하나 써 보내라고 일렀다. 유하람 공자에게,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빨리.
서신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쳤다. 너무 급하게 보이면 안 되고, 너무 태연하게 보이면 또 안 되고. 이 미묘한 균형을 맞추느라 반나절을 꼬박 쏟아부었으니, 이걸 두고 정성이라고 해야 할지 궁상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헷갈렸다. 결국 나는 짧게 썼다.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달라고. 그게 최선이었다.
서신을 보내고 나서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여왔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이건 분명 누군가 나를 압박하기 위해 설계한 숫자였다. 그렇다면 그 설계자는 누구일까. 왕태자 본인일까, 아니면 국왕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누군가일까.
머릿속으로 후보를 하나씩 지워봤다. 국왕이 직접 나설 리는 없었다. 나 같은 몰락한 영애 하나 때문에 국왕이 움직인다는 건 격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태자궁의 문관이 독단으로 이런 서신을 보냈을 리도 없었다. 결국 남는 건 왕태자, 이하준 본인이었다. 그 인간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는 창밖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이번에도 게임판에서 끌려 다니지는 않겠다고.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지켜질지는 나도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답장 대신 찾아온 건 유하람이었다. 서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궁 문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이 사흘이 생각보다 훨씬 더 짧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