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유하람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빨리 왔다. 서신을 보낸 지 반나절도 안 돼서 별궁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온 걸 보면, 이 사람도 뭔가 급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반가움보다 먼저 불안이 앞섰는데, 급하게 왔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시녀 하나 없이 혼자 움직였다는 것도 이상했다. 원래 이 남자는 격식을 중시하는 편이었는데.
"아린 님." 유하람이 낮게 부르며 들어섰다. 여전히 잘 정돈된 옷차림이었고 표정도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눈빛에는 미묘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눈빛만으로도 대충 감이 왔다. 좋은 소식은 절대 아니겠구나.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런 눈빛으로 오는 소식은 백 퍼센트 흉보라는 걸.
"서신을 받고 바로 오신 건가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유하람이 낮은 목소리로 답하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 앞에 마주 앉으며 다과상을 내밀었다. 형식은 갖췄지만 분위기는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 찻잔에서 김이 오르는데도 그걸 마실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왕궁에서 사흘 안에 복귀 여부를 답하라는 서신을 받았어요."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것 때문에 오신 거죠?" "그렇습니다." 유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뜸을 들였는데, 그 잠깐의 침묵이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빨리 말해 달라고, 속으로 애원하듯 그를 쳐다봤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면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태자 전하께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하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문제라면." "정략결혼 건이 완전히 파기됐습니다. 서부 후작가와의 혼담이었는데, 태자 전하께서 공식 석상에서 거부 의사를 밝히셨고, 그 자리에서 한소이 영애를 옹호하는 발언까지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공식 석상에서? 대신들 다 모아놓고? 아니 이 인간은 사고를 칠 거면 조용히 치든가 왜 꼭 사람 다 보는 데서 치는 건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겉으로는 차분하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게임 속 세계관 설정을 대충이라도 알던 나로서는, 후작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후작가는 왕실의 주요 지지 세력 중 하나입니다. 그 혼담이 파기되면서 후작가가 크게 반발하고 있고, 일부 대신들은 태자 전하의 후계 자격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유하람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내용은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후계 자격을 문제 삼는다는 건, 왕태자 자리가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게임에서는 이런 전개가 없었는데. 없었다고, 절대. 나는 게임의 엔딩까지 몇 번이나 클리어했던 사람이었고, 왕태자와 한소이가 이어지는 해피엔딩 루트를 제일 많이 봤다. 그 루트에서 왕태자가 왕위를 잃을 위기에 처하는 전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몇 번이나 클리어했다고 자부했던 회차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훑어봤다. 후작가와의 혼담, 공개 파혼, 후계 자격 문제. 아무리 되짚어봐도 이런 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갈라진 거지. 내가 유폐당하고 단죄받는 그 시점부터?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런데 저는 왜 갑자기 복귀하라는 요구를 받는 거죠." 나는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공개 단죄와 유폐를 명령한 게 태자 전하 본인이셨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유하람이 씁쓸하게 웃었다. "대신들 사이에서는 태자 전하가 공작가 영애를 부당하게 단죄했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후작가와의 혼담을 파기한 것도 그렇고, 아린 님을 단죄한 것도 그렇고, 전하의 판단력 자체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요. 이걸 잠재우려면 뭔가 명분이 필요한데."
"그래서 저를 명예 회복의 증인으로 쓰려는 거군요." 나는 말을 끝맺으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개연성이야. 단죄한 사람이 명예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더라, 그래, 자기 손으로 불 지르고 자기 손으로 물 붓는 격이라고 하지. 하는 짓마다 이렇게 앞뒤가 안 맞으니 대신들이 판단력을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보입니다." 유하람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태자 전하께서 공작가 영애를 다시 공정하게 대우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대신들의 반발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뭘 얻는 거죠." 내가 물었다. "그냥 이용만 당하고 끝나는 건가요." 유하람이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했다. "복귀하시면 명예는 회복될 겁니다. 다만 그 이후는… 전하의 다음 결정에 달려 있겠지요."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 이렇게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나는 다과상 위의 찻잔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이야기가 진짜라면, 지금 왕궁은 내가 알던 게임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원작 게임에서는 왕태자가 이렇게 정치적 위기에 처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뭔가를 건드려서 벌어진 결과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방향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 아니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선우아린이 죽고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되어버린 걸까.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 규칙을 알고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착각이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유하람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한소이 영애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습니다. 최근 학당 내에서 아린 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계속 퍼뜨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린 님이 복귀하면 그 소문들이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마를 짚었다. 게임 속에서 히로인이었던 인물이 실제로는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이거야말로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순수하고 착한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어디로 갔나. 아니, 그 설정 자체가 애초에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본 착각이었던 걸까.
"어떤 소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 유하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말은 결국 나쁜 내용이라는 뜻이었고, 그 나쁜 내용이 뭔지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곧 학당에 발이라도 들이면 저절로 알게 될 텐데, 지금 미리 알아서 심장 상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제가 복귀하든 안 하든, 이미 저는 이 판 위에 있는 거네요."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게임이 끝났다고 믿었던 게 얼마나 순진한 착각이었는지,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 진단했다. 유폐당했을 때는 최소한 이 좁은 별궁 안에서만 버티면 된다는 계산이 섰는데, 이제는 그 계산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판이 넓어졌다. 그리고 넓어진 판 위에서 나는 여전히 말이 아니라 졸에 가까웠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유하람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일단은 거절할 겁니다. 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하지만 이게 얼마나 오래 버틸지는 모르겠네요." 사흘이라는 기한 안에 그럴듯한 거절 사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건강 문제, 심신 안정, 뭐든 좋았다. 다만 그게 오래갈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왕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결국 내 의사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아린 님 편입니다." 유하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 말이 묘하게 든든했지만, 동시에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딱히 은혜를 입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자기 발로 별궁까지 찾아와서 정보를 물어다 주는 이유가 뭘까. 순수한 호의라면 오히려 더 무섭다. 이 세계에서 대가 없는 호의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내 편이라 자처하는 사람을 밀어낼 여유가 없었다.
유하람이 떠난 뒤 나는 창가에 서서 다시 서신을 꺼내 읽었다. 사흘. 이제 그 숫자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서신의 접힌 자국을 몇 번이나 문질렀는지 모른다. 게임 종료라는 말은 착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 판 위에 있었고, 이번엔 규칙조차 내가 알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별궁의 정원이 보였다. 유폐되어 있던 동안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줬던 풍경이었는데, 오늘은 그 풍경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사흘 뒤, 나는 무엇을 답해야 하는 걸까. 거절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복귀한다고 해서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을 골라도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이 기분, 이걸 두고 사람들은 진퇴양난이라 부르던가.
서신을 접어 다시 서랍에 넣으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사흘이라는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흘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 판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수를 마주하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