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형에게 서신을 보낸 건 유하람이 다녀간 그날 저녁이었다. 선우강호, 내 형은 공작가의 실질적인 대외 업무를 도맡고 있었고, 이럴 때 가장 믿을 만한 카드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소문이 퍼졌을 텐데, 형은 입이 무겁고 판단이 빠르니까. 나는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정리해서 적어 보냈는데, 쓰면서도 손이 떨렸다. 붓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글자가 삐뚤어졌고, 그걸 몇 번이나 다시 써야 했다. 왕태자가 정치적 위기에 처했고, 그 위기를 막기 위해 나를 명예 회복의 증인으로 쓰려 한다는 것, 그리고 사흘 안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 종이에 적어놓고 보니 문장은 간결한데 속은 하나도 간결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개연성 없는 전개인가,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지웠다.
형은 다음 날 새벽같이 별궁으로 찾아왔다. 새벽이슬이 아직 마당에 남아 있는 시간이었으니, 서신을 받자마자 말을 달려온 게 분명했다. 얼굴에는 밤새 고민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이럴 때 저 차분함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린아, 상황은 대충 파악했다. 공작가로서는 네가 굳이 왕궁에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본다." 형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우리 형이지. 이 집안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형 하나뿐인 것 같은 날이 많다. "그럼 거절 답신을 보내면 되는 건가요?" 내가 묻자 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거절하면 저쪽에서 명분으로 물고 늘어질 거다. 우리 쪽에서 먼저 조건을 걸어야 해."
형은 몇 가지 카드를 준비해왔다. 공작가의 영지 세금 감면 협상, 왕실 재정 지원 관련 안건,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 몇 년간 왕실이 공작가에 진 정치적 부채까지. 형은 그 목록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는데, 그 손끝이 얼마나 익숙하게 문서를 넘기는지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이 집안의 진짜 어른이구나 싶었다. "이걸 다 걸고 협상하면, 최소한 네가 아무 조건 없이 끌려가는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거다." 형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이 정도면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사흘. 사흘이면 뭔가 더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계산이 무너지는 건 바로 그날 오후였다.
왕실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별궁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형과 함께 협상 문서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손에는 아직 먹 냄새가 남은 종이가 들려 있었고, 그걸 접다가 멈췄다. "이게 뭐야." 형이 먼저 창밖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 미간이 좁아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서 나도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마차에서 내린 건 문관도 사자도 아닌, 왕실 근위대 대장이었다. 갑주 소리가 마당을 울리며 저벅저벅 다가오는 걸 보며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꼈다. 이런 게 심장이 쿵 떨어진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선우아린 영애." 근위대장이 예를 갖췄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국왕 전하의 명입니다. 즉시 왕궁으로 입궁하시라는 왕명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왕명.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는 단어였다. 서신으로 온 요청이 아니라 왕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면, 거절은 곧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비칠 수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고, 들고 있던 종이가 미끄러질 뻔했다.
"이게 무슨..." 형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지만, 근위대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작 영식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왕명은 거역할 수 없습니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나는 그 순간 씨발,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표정 관리가 되는 걸 보면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사흘의 여유는 애초에 없었던 거였다. 저쪽에서 판을 다시 짜버렸으니까. 협상? 카드? 다 소용없었다. 왕명 하나면 다 뒤집히는 판이었다는 걸, 나는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제가 무슨 임무로 소환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미친 인간들이, 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태자 전하의 명예 회복을 위한 공식 증인으로 소환하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근위대장의 대답에 형과 나는 동시에 표정이 굳었다. 유하람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강제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 그냥 서신 한 통으로 오갈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왕태자 쪽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조차 없었던 거지.
"이건 부당합니다." 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에는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닌데,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동생은 아무 잘못 없이 단죄를 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명예 회복의 증인이라니,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근위대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 사람도 저 자리에서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명을 전달하러 온 사람일 뿐인데. "영식, 저는 왕명을 전달할 뿐입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국왕 전하께 직접 알현을 청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형과 나는 서로를 쳐다봤다. 알현. 그 단어가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게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국왕이 직접 왕명을 내렸다는 건, 이미 결정이 확정됐다는 뜻일 가능성이 컸다. 알현을 청한다고 국왕이 만나줄지, 만나준다 해도 마음을 바꿀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지푸라기가 얼마나 가늘든 잡아야 하는 거니까.
"알현을 청하겠습니다." 형이 근위대장에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나는 형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봤다. "그동안 소환은 잠시 미뤄주십시오." 근위대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갑주 아래로 숨을 한 번 크게 내뱉는 게 보였다. 결국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근위대장이 물러난 뒤 별궁 안은 정적에 잠겼다. 마차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다과상 앞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봤다. 다과상 위의 찻잔에서는 김이 조금씩 올라오다 이내 사라졌고, 그게 딱 지금 내 처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이라는 여유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남은 건 단 하루, 그리고 국왕과의 알현이라는 마지막 카드뿐이었다.
"내일 알현에서 최대한 강하게 나가야 한다." 형이 낮게 말했다. "공작가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할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게 통할까, 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다. 왕이 이미 마음을 정했다면, 형이 아무리 강하게 나가도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 부딪혀야 하는 거잖아.
게임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었다. 국왕이 직접 나서서 나를 소환하는 전개 같은 건 상상도 못 해본 시나리오였다. 원작 소설에서도, 게임 시나리오에서도 이런 갈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내가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던 숨겨진 시나리오인지 알 수 없었다. 원작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 나는 완전히 게임 밖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정보가 더는 안전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내일의 알현을 준비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논리를 세워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국왕이 이렇게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저렇게 나오면 저렇게 받아치고. 밤이 깊어질수록 시뮬레이션의 가지는 늘어났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해도 마음 한구석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왕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내 말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창밖으로 별궁의 등불이 하나둘 꺼지는 걸 보면서, 나는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