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알현에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형과 함께 공작저로 향했다. 별궁으로 곧장 기어들어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 가문의 힘을 최대한 긁어모아야 했으니까. 왕명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딱 하나, 등 뒤에 서 있는 세력의 크기를 키우는 것뿐이었다.
마차 안에서 형은 계속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글씨가 흐트러지지 않는 걸 보면 이 사람은 손끝에 뭔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정리했다. 왕명, 명예 회복 증인, 협상 결렬. 세 단어를 늘어놓고 보니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게 없었다. 정리할수록 상황은 더 나쁘게만 보였는데, 이럴 땐 정리를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더 나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아버린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형." 나는 조용히 불렀다. "표정이 왜 그렇게 편해 보여요?"
"편해 보인다고? 이게 편한 얼굴로 보이나." 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냥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늘 이 얼굴이다. 걱정과 무표정을 구분 못 하는 거 아니냐."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도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공작저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이미 서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태윤 공작은 나이가 지긋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이 사람만큼은 확실히 내 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게 나를 등지고 있어도 이 서재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게 이상하게 든든했다.
"들었다."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왕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그냥 끌려가지는 않을 거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서재 안 공기까지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린아, 네가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곳에서 네 입지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뭘까. 뭘 준비해 오신 걸까. 심장이 벌써부터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기대감도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강호가 지난 몇 달간 조사해 온 게 있다." 아버지가 형을 향해 눈짓했고, 형이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소이 영애와 관련된 정황이다." 형이 말했다. "네가 단죄될 때 제출됐던 증언들, 그중 일부가 조작됐다는 증거를 찾았다."
나는 그 서류를 집어 들며 눈을 크게 떴다. 조작. 이 단어가 이렇게 반갑게 들릴 줄은 몰랐다. 살면서 이렇게 예쁜 두 글자를 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단언컨대 없었다.
"어떤 부분이 조작된 거예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티가 났을까. 티가 나도 상관없었다.
"네가 학당에서 한소이 영애를 위협했다는 증언, 그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형이 설명했다. "당시 목격했다고 주장한 시녀는, 사실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우리가 확보한 별도의 증인이 있고, 그 시녀가 왜 거짓 증언을 했는지 배후도 추적 중이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게임 시나리오에도 없던 정보였다. 원작에서는 내가 정말로 한소이를 괴롭혔다는 설정이었는데, 지금 이 세계에서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명백한 조작이었고,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몰락시키려 했다는 뜻이었다. 원작 지식이 이번엔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게 무섭다가도, 동시에 이건 원작보다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틀어진 거라는 사실이 웃겼다. 세상 참 알 수 없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누가 이런 걸 조작한 거예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커졌다. 서재 안에 있던 촛불이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버지가 신중하게 답했다. "다만 정황상 한소이 영애 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녀에게 금전적 이득을 제공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임 속 히로인이었던 한소이가, 실제로는 이렇게 뒤에서 조작을 벌이는 인물이었다니. 게임과 현실의 간극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게 무섭게 느껴졌다. 순백의 여주인공, 모두가 사랑하는 캐릭터. 그런 이미지 뒤에 이런 얼굴이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묘한 안도감도 들었는데, 적어도 이번엔 내가 완전히 무고하다는 증거가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고함을 증명하는 것도 이렇게 벅찬 일이었나. 살면서 이렇게 안도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 증거를 지금 당장 공개할 수 있나요?" 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이 서류를 들고 왕궁으로 뛰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직은 안 된다." 아버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증인 확보와 추가 정황이 필요해. 섣부르게 공개했다가 오히려 무마당할 수도 있다. 왕궁 내부에도 한소이 영애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조금 실망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신중함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섣부른 폭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었다. 칼은 뽑는 순간보다 뽑는 시점이 중요한 법이니까. 이건 무협 소설에서도 많이 나오는 교훈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교훈이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럼 언제 사용할 생각이세요?"
"적절한 때가 오면." 아버지가 짧게 답하며 서류를 다시 정리했다. 손끝이 서류를 정돈하는 동작마저 군더더기가 없었다. "지금은 이걸 확실한 카드로 준비해두는 게 우선이다. 네가 왕궁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이 카드를 쓸 시점도 달라질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이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왕궁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됐다. 빈손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칼 한 자루라도 숨기고 들어가는 건 천지 차이였다.
형이 덧붙였다. "학당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유하진 공자가 그쪽에서 정보를 계속 모아줄 거다. 필요할 때 연락하도록 해."
나는 유하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람의 형제이자, 게임에서 공략 대상이었던 인물. 다행히 이 사람은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믿을 만했다. 이 아수라장 같은 왕궁 안에서 중립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런 균형감을 가진 사람이 내 편에 서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락은 어떤 방식으로 하면 돼요?" 나는 물었다.
"학당 내부에 신뢰할 만한 통로를 마련해뒀다." 형이 답했다. "필요하면 알려주겠다. 지금은 몰라도 된다.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알게 될 거다."
뭔가 신비주의 콘셉트를 잡는 건가 싶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형이 저렇게 말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형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가문의 힘, 형의 정보력, 그리고 숨겨둔 증거까지. 이 정도면 왕궁으로 돌아가서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버틴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 사이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몇 개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별궁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정원에 나와 밤하늘을 봤다. 별이 유난히 밝았는데, 그 아래서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번엔 그저 게임의 흐름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내가 가진 모든 카드를 써서 이 상황을 뒤집겠다고. 원작이 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짜놓은 판이라면, 이제는 그 판을 뒤엎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은 쉬웠다. 다짐은 늘 쉬웠다. 문제는 그 다짐을 실제로 지켜내는 게 어려운 거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냥 이 결심을 믿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다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는, 다음 날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다시 깨닫게 됐다. 마차는 흔들렸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괜히 폈다 접었다 하며 긴장을 달래려 했다. 마차가 왕궁 정문을 지나는 순간, 저 멀리 학당 건물 앞에 서 있는 한소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마차 안에서 조용히 숨을 삼켰다. 저건 그냥 반가움의 웃음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해놓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게 불안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어젯밤의 다짐이 벌써부터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