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매일 독약 먹는 삼남입니다

1화

쓴맛이 혀뿌리부터 치고 올라왔다.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훑는 열감. 그다음엔 손끝이 저렸다. 나는 8년차 약사였다. 삼십 년 인생 중 8년을 조제실에서 보낸 남자가, 정작 자기 몸에 뭘 넣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임상 승인이 3년째 안 나던 진통제 시제품을, 새벽 3시에 혼자 먹어본 게 문제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혼잣말이 마지막 유언이 될 줄은 몰랐다. ···망했다. 손이 떨렸다. 조제대 위 약병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해독제를 만들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성분표를 되짚었다. 활성탄, 중화제, 이온음료 —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철퍽. 무릎이 바닥에 꺾였다. 유리병이 굴러 깨지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온몸의 감각이 하나씩 꺼졌다. 청각, 시각, 마지막으로 촉각. 그리고 새하얀 어둠. ***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건 냄새였다. 낯선 나무 냄새, 그다음엔 향, 그다음엔 어딘가 익숙한 씁쓸함. 손을 들어보니 내 손이 아니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 손등엔 옅은 상처 자국. ···이게 뭐야. 당황할 새도 없었다. 눈이 저절로 주변을 훑었다. 천장이 높았다. 대들보마다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벽엔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어디 사극 세트장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냄새가 너무 진짜였다. 나무 타는 냄새, 촛농 냄새, 그리고 옷에서 나는 낯선 섬유 냄새까지. "정신이 드느냐."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넓은 홀, 대리석 바닥, 촛불이 스무 개는 넘게 켜져 있었고, 정면 상석에 백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고, 표정에 감정이 없었다. [이강철 후작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누구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님." 내가 말한 게 아니었다. 이 몸의 반사였다. 순간 머릿속이 정보로 가득 찼다. 나는, 정확히는 이 몸은, 이후작가의 삼남 이서준이었다. 열다섯. 두 달 전 저택을 뛰쳐나갔다가 사흘 만에 붙잡혀 왔다. 지금은 그 죄를 갚는 자리였다. 기억이 밀려드는 방식이 이상했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읽는 기분이었달까. 이서준, 이 몸의 주인은 검을 잡느니 책을 잡느니 하는 형들 사이에서 유독 몸이 약했다. 어릴 때부터 골골거렸고, 그게 콤플렉스였다. 도망친 이유도 어이없이 단순했다. 셋째 형이라는 이유로 매번 무시당하는 게 지겨워서, 라고. ···야, 이 집안 뭔가 심하게 스파르타식인데. "삼남 이서준. 가문의 규율을 어기고 도망친 대가를 잊었느냐." 이강철의 목소리는 판결문을 읽는 것처럼 건조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자다. 그러나 나약함으로 도망친 자에겐 살릴 가치가 없다. 그래서 우리 가문은 독을 내린다. 견디면 살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고, 죽으면 그것대로 증명이다." ···가훈이 미쳤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못 했다. 이 집안 가훈 만든 사람 나와서 강의 좀 해줬으면 좋겠다.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저런 걸 대대로 물려주고 있는 건지. 주변을 살폈다. 홀 양옆으로 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다들 표정이 없었다. 마치 이 의식이 몇 번이나 반복된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익숙하다는 건, 여기서 죽은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옆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은잔을 받쳐 든 청년이 다가왔다. 이십 대 초반, 나와 비슷한 눈매, 다만 표정에 지친 기색이 더 짙었다. "둘째 형, 이건우입니다." [이건우가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오늘 몫입니다. 세 시간 안에 증세가 나타날 겁니다. 견디십시오." 존댓말인데 위로가 아니었다. 통보였다. 잔 속에서 검붉은 액체가 흔들렸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형이라는 사람이 동생한테 독약 갖다주면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아니 뭐, 이건 가문 규율이니 이해는 하겠는데, 표정 관리 좀 하지. 이건우의 손을 봤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표정만 무덤덤할 뿐, 손끝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 사람도 이 짓이 싫은 건가. 그 순간이었다. 【판정: 부자(附子) 추출물, 독성 4등급, 치사량 근접】 머릿속에 그 문장이, 마치 누군가 귓가에 대고 읊어주는 것처럼 선명하게 박혔다. "뭐, 뭐야 이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건우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전생에 그렇게 죽었는데 이번에는 성분이 자동으로 뜨네. 이게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선 신의 계시나 마찬가지였다. 부자, 즉 오두 뿌리. 강심 작용도 있고 마취 작용도 있지만, 이 정도 농도면 아이 몸에 치명적이다. 약사로 일하며 수백 번은 봤던 이름이었다. 다만 이렇게 순도 높게, 이렇게 대놓고 마시라고 준 적은 없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돌아갔다. 체중 대비 흡수율, 대사 시간, 반감기. 8년 동안 조제실에서 굴러먹은 감각이 몸은 바뀌었어도 뇌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이 몸은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것이라, 체중이고 대사고 다 성인 기준으로는 계산이 안 맞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성인이었어도 죽었을 양을, 애 몸에 들이붓는 거였다. 손이 떨렸다. 잔을 받아야 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감별: 해당 성분은 다량의 수분과 감초 성분으로 흡수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또 그 목소리였다. 이번엔 좀 더 구체적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 그리고 촛불 옆 작은 다과 접시에 놓인 마른 감초 조각. 의례용 장식인지 실제 약재인지는 몰랐지만, 지금 나한텐 그게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이 판단창인지 시스템인지 뭔지 모를 목소리를 완전히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잡아야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가리진 않는다. "목이 마르니, 마시기 전에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강철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규칙에 없는 요구다." "···규칙을 어긴 벌을 받는 자리니까요. 마지막으로 목이라도 축이고 싶습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뻔뻔하게 튀어나왔다. 전생의 뻔뻔함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약국에서 진상 손님 상대하던 경험이, 하필 여기서 도움이 될 거라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강철이 손을 들었다. 허락이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인 느낌이었다. 하인들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그 무표정 사이로 미묘한 술렁임이 흘렀다. 아마도 이런 요구를 한 사람이 처음이었을지도. 이건우가 물병을 내밀 때, 나는 감초 조각을 슬쩍 손에 쥐고 입에 밀어 넣었다. 씹었다. 쓰고 달았다. 그리고 물을 최대한 많이 삼켰다. 목구멍이 뻐근할 정도로 들이켰다. 물이 위장 속에서 출렁이는 느낌이 났다. 이렇게라도 해서 흡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세 시간이라던 그 시한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을지 몰랐다. 이건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빛이었지만, 캐묻진 않았다. ···저 형, 눈치가 빠른 건가 느린 건가 모르겠네. 그다음 잔을 받았다. "드십시오." 이건우의 목소리엔 미안함도 재촉도 없었다. 그냥 사실 전달이었다. 나는 잔을 들었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장이 벌써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손끝에 잔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은으로 된 잔인데도 이상하게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게 아니라 내 손이 식어가고 있는 거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전생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새벽 3시, 조제대 앞에서 시제품을 들고 망설이던 그 순간. 그때도 손이 이렇게 떨렸었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죽어봤잖아. 두 번째는 좀 낫겠지. 말도 안 되는 자기 위로를 하며 잔을 들이켰다. 뜨겁고 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혀뿌리부터 치솟는 그 익숙한 쓴맛. 전생의 마지막 순간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열감, 위장을 훑고 지나가는 화끈함. 데자뷰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철퍽. 몸이 앞으로 쏠렸다. 시야가 흔들렸다. 촛불이 스무 개에서 마흔 개로 늘어난 것처럼 번져 보였다. 누군가 소리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이건우의 목소리인지 이강철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 뜨거운 게 역류하려는 느낌이 났다. ···안 돼, 지금 토하면 감초고 물이고 다 의미 없어진다. 이를 악물었다. 물에 젖은 나무판자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시야 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검은 얼룩이 점점 커지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건 이건우의 손이었다.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그 손이, 나를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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