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케이스는 계속해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은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초원의 바람이 케이스 표면을 스치면서 생기는 진동이겠거니, 혹은 우리가 이곳으로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의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 손끝이 떨리는 거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은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니 그런 낙관적인 해석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거 좀 이상해. 내가 잡고 있는데 자기 혼자 움직이는 것 같아." 그녀가 팔을 뻗어 케이스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며 손끝의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진동은 심장 박동과 비슷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그 안의 무언가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그 미세한 두근거림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활을 잡은 손이 떨릴 때의 그 느낌과 닮아 있었다. 다만 이번엔 내가 떠는 게 아니라 물건이 떠는 거였다. '설마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건가.' 살아있는 짐승이 갇혀 있다는 상상까지 스쳤지만, 케이스의 크기와 형태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스의 걸쇠를 풀었고, 뚜껑을 젖히는 순간 안에서 흘러나온 빛이 초원의 햇살과는 다른 결의 은은한 광택으로 반짝였다. 그 빛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는데, 다시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그저 표면에 반사된 햇빛일 뿐이었다. 안도와 동시에 약간의 실망이 스쳤다. 뭔가 초자연적인 광채를 기대했던 걸까, 나도 참 어지간히 순진한 기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몸통은 붉은빛이 도는 짙은 갈색 바니시로 덮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인지 원래의 균열인지 모를 미세한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으며, 스크롤 끝의 소용돌이 조각은 인간의 손으로 깎았다기엔 지나치게 정교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는데, 손끝에 닿는 무게감과 질감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케스트라에서 잘리기 전까지, 나는 십수 년 동안 명기라는 것들을 만져 왔던 사람이었다. 리허설 전에 수석 연주자들의 악기를 조율해 주던 시절도 있었고, 경매장 뒷방에서 감정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어깨너머로 주워듣던 시절도 있었다. 그 모든 경험이 지금 이 순간을 향해 한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이건... 이건 그냥 흔한 공방 물건이 아니야.'
f홀의 형태, 브릿지의 각도, 스크롤 아래로 이어지는 넥의 곡선까지, 이 모든 게 어디선가 사진으로만 봤던 어떤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몸통을 뒤집어 뒷판을 살폈다. 단풍나무의 결이 불꽃처럼 퍼져나가는 무늬, 그리고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지 않는 미묘한 비대칭. 이건 기계로 찍어낸 게 아니라 사람의 손이, 그것도 극히 드문 수준의 장인이 깎아낸 물건이라는 증거였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마흔한 해를 살면서 이런 물건을 실제로 손에 쥐어볼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거...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데." 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은서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거 진짜야? 그 스트라디바리우스?" "확신은 못 하지만, 이 정도 완성도의 곡선이랑 바니시 색은 흔한 게 아니야. 이런 게 왜 초원 한복판에서, 죽은 사람 손에 들려 있는 건지가 더 문제지." 나는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케이스에 다시 눕히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마흔한 해를 살아온 경험으로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를 찾을 수 없었다. 진짜 스트라디바리우스라면 어느 미술관 금고나 재단 소유의 특수 보관실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런 게 낡은 시신의 손아귀에, 아무도 없는 이 낯선 초원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이 세계의 논리를 통째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은서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이게 왜 나한테 있었지. 난 이런 거 만진 적도 없는데." 그 말이 맞았다. 은서는 고등학교 시절 국내산 연습용 바이올린을 쓰던 걸로 기억했고, 그것도 음악부 활동 후로는 접었다는 얘기를 서지연에게서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손끝에 이런 명기가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녀의 손에 이걸 쥐여준 것처럼, 혹은 이 세계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뭔가가 뒤섞이고 뒤바뀐 것처럼.
"혹시 이거, 원래 자네 게 아니라 다른 사람 것 아닐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다른 사람은 어디 있는데? 여긴 우리 둘밖에 없었잖아."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각성했던 지점에는 그 시신 하나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 시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백골이 되어가는 손, 그 앙상한 손가락이 마치 악기를 켜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것이 문득 다시 신경을 긁었다.
그때, 우리가 처음 각성했던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관목 뒤편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걸렸다. 풀잎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그 표면에 부딪혀 짧게 반사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풀숲에 반쯤 파묻힌 채로 또 다른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이번 것은 훨씬 낡고 허름했으며, 손잡이 가죽이 갈라져 있었고 모서리는 색이 완전히 벗겨져 나가 있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기보다는, 누군가가 급하게 내던지고 도망친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열어 보았고, 안에는 훨씬 단순한 마감의 바이올린이 들어 있었는데, 몸통에 작게 새겨진 로고가 눈에 익었다. 화려한 장식도, 정교한 곡선도 없는, 그야말로 대량생산 공방에서 찍어낸 흔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그 소박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이거... 은서 자네 것 같은데." 나는 케이스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국내 공방 물건이야. 상표 보니까 '피그말리우스'라고 새겨져 있는데." 은서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얼굴빛이 확 밝아지며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이거 맞아, 이거 내 거야.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거." 그녀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까지의 불안이 조금 걷힌 듯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은서는 자기 바이올린을 품에 안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 시선은 곧 다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담긴 케이스로 향했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겹쳐 있었다. "저건 어떻게 하지. 저게 왜 나한테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계속 저렇게 진동하는 것도 무섭고."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 역시 저 물건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 침착한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그나마 상황이 덜 무서워지는 법이다.
나는 그 낡은 명기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케이스를 내 어깨에 메며 말했다. "내가 들지. 어차피 자네보다는 내가 이런 거 다루던 사람이니까." 은서는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순간 명기를 어깨에 걸친 채로 뭔가 무거운 책임감이 등에 얹히는 걸 느꼈다. 물리적인 무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이 물건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원인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오케스트라에서 잘리고 십 년 넘게 손을 놓았던 내가, 하필 이런 낯선 세계에서 다시 명기를 짊어지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게 참 얄궂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저 멀리 지평선 쪽에서 낮고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뒤척이는 듯한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져 왔다. 처음에는 멀리서 치는 천둥소리인가 싶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두 번째 소리는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가까이서, 조금 더 또렷하게 울렸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통째로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은서와 나는 동시에 그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초원의 지평선 끝,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그 너머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