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 우리 왜 어려졌어?

4화

진동이 완전히 잦아든 것은 채 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지만, 그 여운은 발바닥을 통해 계속 뼛속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거대한 심장을 한 번 쿵, 두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마흔한 해를 살아오면서 지진이라면 지겹도록 겪어봤지만, 이건 그런 익숙한 흔들림과는 궤가 달랐다. "저거 뭐였어?" 은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고, 나는 지평선 쪽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근데 여기 계속 서 있는 것보단, 저 도시 쪽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손을 들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저 멀리 반짝이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초원 끝,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는 그 경계선 위로, 회색과 은빛이 섞인 건물들의 윤곽이 어렴풋이 떠 있었다.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떠 봐도 건물인지 바위산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쪽에는 뭔가 '인공적인' 것이 있다는 확신만은 들었다. 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저게 도시야? 여긴 대체 뭐가 있는 곳인데."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지만, 짐짓 여유로운 척 어깨를 으쓱했다. "가 보면 알겠지. 서 있어 봐야 답 안 나오는 건 확실하니까." 속으로는 '나도 알고 싶다, 나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서 서로의 불안을 배로 키울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든 케이스는 내 등에, 피그말리우스는 은서의 품에 각각 자리를 잡았고, 두 개의 명기를 짊어진 두 소년소녀의 그림자가 초원 위로 길게 늘어졌다. 발밑의 풀은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종아리를 스치는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축축했다. 이슬이라기엔 늦은 시간이었으니 아마 이 세계 특유의 습기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걷는 동안 은서는 계속 자기 죽음의 순간을 되짚어 보려 애쓰는 눈치였다. 그녀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하다가,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살피며 문득 서지연을 떠올렸다. 은서와 서지연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고 들었으니, 이 상황을 지연이 알게 된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졌다가, 곧 그런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전처 걱정할 여유가 있으면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내는 게 순서겠지.' 게다가 이혼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그 이름이 왜 떠오르는지도 스스로 우스웠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질기고도 얄궂은 데가 있어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름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곤 했다. "뭐 좀 기억났어?" 내가 넌지시 묻자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뭔가 뜨겁고, 빛이 확 터진 것 같은 느낌만 남아 있어. 근데 그게 죽는 순간이었는지, 다른 뭔가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거면 충분해. 나도 딱 그 정도까지밖에 기억 안 나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 세계에 던져진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죽음의 기억을 가위질당한 채로 시작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풀숲 사이로 낮은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처음엔 바람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었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번져 왔다. 마치 누군가 목이 졸린 채로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한, 낮고 습한 소리였다. 은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내 옆으로 붙어 섰다. 그녀의 팔이 내 팔에 살짝 닿았는데, 그 체온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거 짐승 소리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 긴장이 섞였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조용히 있어 봐. 무슨 상황인지 먼저 확인하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마흔한 해를 산 정신도 결국 이 낯선 몸의 생리적 반응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심장은 이미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고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팽창하는 감각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이 몸뚱이는 아직 위험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가.' 속으로 그런 시답잖은 분석까지 하고 있는 걸 보면, 여유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 자신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울음소리는 왼쪽 관목 지대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은서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발을 옮기며 나는 최대한 마른풀을 밟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 몸의 균형감각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탓에 몇 번이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목 사이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짐승이라기보단 그림자가 형체를 갖춘 것처럼 보였는데, 윤곽은 늑대와 비슷했지만 표면이 매끄러운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몸의 경계가 계속 흐릿하게 흔들리며 뭉개졌다가 다시 맺히기를 반복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붉은 빛 두 점만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빛은 마치 숯불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명멸했다. 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은서의 손을 붙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뛰어!" 내 외침과 동시에 그 형체가 낮게 몸을 웅크리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 도약의 속도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 것이었고, 나는 그걸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 '아, 이건 게임으로 치면 초반 필드에 나오면 안 되는 몹인데'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스쳤다. 우리는 초원 위를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몸의 다리 길이와 근육의 반응 속도가 계속 어긋나면서 몇 번이나 발이 엉킬 뻔했다.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 풀잎이 정강이를 베듯 스치는 통증,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은서는 품에 안은 피그말리우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검은 형체가 이미 우리 뒤 몇 걸음 거리까지 따라붙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비명을 삼켰다. "빠,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그녀가 헐떡이며 외쳤고, 나는 대답할 여유조차 없어 그저 고개만 짧게 저었다. 나는 등에 멘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무게가 뛸 때마다 몸을 흔드는 걸 느끼면서도, 앞만 보고 다리를 움직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대로면 못 도망친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발밑의 땅이 갑자기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균형을 잃은 채 은서와 함께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뒤집히고, 하늘과 땅의 위치가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나는 어둠 속으로 삼켜지는 우리를 향해 붉은 두 점의 빛이 마지막으로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