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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박우현이 나간 뒤, 나는 혼자 방에 앉아 다시 그 창을 불러냈다. [상태창] [단전 크기: 최하위 등급] [내공 수용률: 3% 미만] [체질: 무공 자질 극히 낮음] '이거 완전 뽑기 최하등급이잖아.' 전생에서 게임 좀 해봤다. 확률형 아이템, 몇 번을 뽑아도 최하급만 나오는 그 좌절감. 근데 이번엔 뽑기가 아니라 내 몸이었다. [경고: 내공 강제 주입 시 주화입마 확률 87%] 와, 87퍼센트. 로또보다 확실하게 죽는 확률이었다. '이건 그냥 패가 나쁜 게 아니라, 판 자체가 잘못 짜여진 거잖아.' 나는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장의 무늬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원 소유자의 기억을 뒤져봤다. 이 몸, 17살 강준서는 3년 전부터 무공 수련을 시도했다. 매일 아침 마당에서 기마 자세를 잡고, 매번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때마다 형제들과 하인들은 웃었다. 둔재. 그 단어가 이 몸에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기억 속엔 다른 장면도 있었다. 아버지가 형들 앞에서 준서를 불러 세워놓고, "저놈은 그냥 방구석에 놔둬라" 하던 순간. 그 말을 들은 열네 살짜리가 눈물도 못 흘리고 고개만 숙이던 순간. '와, 이거 완전 학교 다닐 때 반 등수 붙여놓고 대놓고 창피 주는 선생 같잖아.' 근데 이건 등수가 아니라 목숨줄이라는 게 문제였다. '근데 원래 이 몸 주인은 도박이라는 걸 몰랐겠지.' 무공이란 게 결국 뭔가. 동작과 동작 사이의 흐름, 상대의 다음 수를 읽는 것. 포커에서 상대의 표정 근육 하나로 패를 읽는 것과 뭐가 다른가. 결국 정보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정확하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다. 내공이라는 판돈이 없어도, 패를 읽는 눈이 있으면 이긴 판도 있었다. '전생에 그렇게 살았잖아, 나는.' [경고: 내공 강제 주입 시 주화입마 확률 87%] 다시 뜬 경고 메시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근데 강제 주입 안 하면 되잖아."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내공을 억지로 밀어 넣어서 그릇을 넘치게 하는 게 문제라면, 넘치지 않게 쓰면 된다.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대한의 효율. 그게 도박사가 평생 해온 일 아니었나. 적은 자본으로 큰 판을 뒤집는 것.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초보들이나 하는 거지.' 진짜 고수는 최소 배팅으로 최대 수익률을 뽑는다.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갔다. 박우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왔다. "도련님, 아직 몸도..." "괜찮습니다. 그냥 서 있기만 할 거예요." 박우현의 눈이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나를 훑었다. 이 노인 입장에선 당연했다. 방금까지 죽다 살아난 것처럼 앓아누워 있던 도련님이,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겠다니. '나라도 저 얼굴 하겠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원 소유자의 기억 속에 있는 기본 초식을 떠올렸다. 동운시 강씨 가문의 기본 보법, 팔방류(八方流). 여덟 방향으로 발을 딛는 단순한 움직임이었는데, 이 몸은 이 단순한 것도 매번 넘어졌다. '근데 이거, 확률적으로 보면 완전 비효율적인 동작이잖아.' 원 소유자는 여덟 방향을 순서대로, 정직하게 밟았다. 체력을 균등하게 소모하면서. 동쪽, 남동쪽, 남쪽, 순서대로. 마치 교과서 예제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근데 정직한 게 항상 답은 아니었다. 포커에서 정석대로만 배팅하는 놈은 항상 블러핑에 털렸다. 나는 다르게 봤다. 어느 방향이 다음 방향으로 이어질 때 관절 부담이 가장 적은지. 어느 순서로 밟으면 무게중심이 덜 흔들리는지. 그 계산은 순식간에 끝났다. 마치 카드 패를 훑어보는 것처럼. [스킬 발현 조건 충족] [패시브 스킬: 확률연산(確率演算) 각성] '응?' [확률연산: 상대 또는 대상의 다음 동작 예측 확률을 실시간으로 계산합니다. 내공 소모 없음.] 내공 소모 없음. 이 한 줄이 눈에 확 박혔다. '이거였구나.' 무공 자질이 최하위라 내공을 못 써도, 이건 쓸 수 있다. 전생의 계산력, 도박사의 통찰력이 그대로 스킬로 전환된 것이었다. '이러니까 진짜 옛날에 카드 세는 것만 20년 한 보람이 있구나.' 누가 알았겠나, 그 재능이 무림 세계에서 이렇게 부활할 줄. 나는 다시 팔방류를 밟았다. 확률연산이 발끝의 각도, 무릎의 각도, 다음 발이 디딜 위치를 미리 그려줬다. 머릿속에 흐릿한 선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발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무게를 어느 쪽으로 옮겨야 하는지. 그대로 따라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넘어지지 않았다. 박우현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그 눈이 마치 처음 걷는 아기를 보는 부모의 눈 같았다. "도련님... 지금 그거..." "우현 어른, 이거 좀 신기하지 않습니까." 나는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내공은 전혀 안 썼다. 그런데 동작은 완벽했다. 마치 정답을 미리 알고 문제를 푸는 느낌이었다. '이거면 되겠다.' 박우현이 뭔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그 표정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의심, 놀라움, 그리고 아주 조금의 희망 같은 것. 3년 동안 매일 아침 코피 흘리는 도련님을 봐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믿기는 쉽지 않을 거였다. '나라도 안 믿겠지.' 물론 한계는 있었다. 확률연산은 동작을 예측할 뿐, 힘 자체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체력이 부족하면 알아도 못 움직인다. 지금 이 허약한 몸으로는 세 걸음 이상 걸으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답을 알아도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카드를 못 뒤집는 꼴이었다. '와, 이거 완전 시험 답은 다 아는데 손이 떨려서 마킹 못하는 그 느낌이잖아.' [경고: 신체 근력 부족으로 인한 스킬 발동 한계] '그럼 근력을 키워야겠네.' 계단식으로 계획이 세워졌다. 먼저 확률연산으로 최소 내공, 최소 근력으로도 효율적인 동작을 익힌다. 그다음 근력 자체를 키운다. 마지막에 실전에서 증명한다. 세 단계, 딱 세 단계. 복잡할 필요 없었다. 복잡한 전략은 항상 실행 단계에서 무너지는 법이었다. 증명해야 할 자리는 곧 찾아올 거였다. 가문의 연말 시험, 무재를 가리는 자리. 원 소유자의 기억 속에 그 날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보름 뒤. 보름. 전생으로 치면 시험 2주 남기고 벼락치기 시작하는 그 타이밍이었다. '근데 이번엔 커닝 페이퍼가 진짜 내 머릿속에 있으니까, 조건은 나쁘지 않네.' "우현 어른, 저 훈련을 좀 해야겠는데요." 나는 마당 흙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도련님이... 다시 무공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박우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지난 3년, 이 노인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도련님을 얼마나 많이 지켜봤을까.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 자세를 잡고, 넘어지고, 코피를 흘리고, 다시 일어나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매번 기대했다가 매번 무너지는 걸 3년 반복했으면, 이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서울 거였다. 그 얼굴에 담긴 걱정이 이해가 갔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박우현이 잠시 나를 살피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눈동자에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지만, 더는 말리지 않았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잠깐 생각했다. '저 사람, 앞으로 몇 번을 더 놀라게 될까.' 아마 이번 보름 안에 놀랄 일이 한두 번은 아닐 거였다. 그날 밤, 마당 너머 담벼락에서 누군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임재현이었다. [정보 병합: 임재현, 정혼자의 형] 원 소유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평소 나를 마당의 흙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다. 가문 모임 때마다 준서를 향해 던지던 시선이 있었다. 동정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고, 그냥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 보는 눈빛. 그런 그가 담벼락 너머에서 팔짱을 끼고 실눈을 뜨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거야." 임재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둔재 강준서가 넘어지지 않고 팔방류를 밟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손끝이 담벼락 위를 톡톡, 두드렸다. 뭔가 계산하는 듯한, 혹은 불쾌한 것을 곱씹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는 한참을 더 지켜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다음 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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