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복만루는 원 소유자의 기억 그대로였다.
남문 대로변, 3층짜리 목조 건물.
간판에는 낡았지만 큼지막한 글씨로 '복만루'라 적혀 있었다.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세월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또 장사가 잘 되는 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낡았는데 손님이 많다는 건 최소한 음식은 진짜라는 뜻이지.'
문제는 그 매출이 어디로 새고 있는지였다.
나는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박우현과 함께 저녁 무렵 그곳으로 향했다.
값싼 무명옷을 걸치니 도련님이 아니라 그냥 동네 청년 같았다.
거울이 없어서 확인은 못 했지만, 박우현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위장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도련님, 정말 이렇게 몰래 오셔도..." 박우현이 문 앞에서 다시 걱정을 늘어놨다.
벌써 세 번째였다.
집을 나설 때 한 번, 골목을 돌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걱정도 삼세번인가.'
"우현 어른, 걱정 마세요. 그냥 손님인 척 밥 먹고 가는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 관리인이 도련님을 알아본다면..."
"10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쳤던 둔재 도련님 얼굴을요? 아마 저보다 우현 어른 얼굴을 먼저 알아볼걸요."
박우현이 뭐라 반박하려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1층은 시끌벅적했다.
손님이 정말 많았다.
탁자마다 사람이 앉아 술을 마시고, 점소이들이 바쁘게 오갔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 술잔 넘치는 소리, 어디선가 터지는 웃음소리까지, 완전히 살아 있는 가게였다.
'이 정도면 하루 매출이 100량은 우습게 넘을 것 같은데.'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국수를 시키며 주변을 살폈다.
탁자를 세어봤다.
1층에만 스무 개가 넘었고, 2층에서도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3층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유민석이 매달 500량씩 빼먹고도 남을 그림이었다.
점소이 하나를 슬쩍 불러 물었다.
"여기 요즘 장사 잘 되나요?"
"그럼요! 매일 이 정도예요." 점소이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주인이 좋은 사람인가 보네요."
"주인장은 뭐, 그냥 저희끼리 알아서 하고요. 관리하시는 어르신이 계세요."
"주인장이 누구시더라..."
"유 관리인 어르신이요. 오늘도 뒤채에 계세요."
유민석.
뒤채에 있다면 가서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부딪치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판을 다 보기 전에는 패를 까지 않는다.
'화투판에서도 초반에 패 다 보여주는 놈이 제일 먼저 지는 법이지.'
국수가 나왔다.
면발이 굵고 국물이 걸쭉했다.
한 젓가락 뜨자마자 박우현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우현 어른, 국수 안 드세요?"
"저는...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닙니다."
"저는 되는데요."
박우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십니까'라는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확실한 결과가 나올 판을 짜고 있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한 건 패가 안 보일 때뿐이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박우현과 뒷문 쪽으로 슬쩍 돌아갔다.
건물을 빙 둘러 가는 동안, 벽에 붙은 낡은 장부 게시판 같은 것도 발견했다.
'이번 달 매출 320량'이라고 붓글씨로 대충 써놨는데, 아마 손님들에게 보여주기용일 터였다.
'320량이라. 그럼 실제로는 그 두 배쯤은 되겠네.'
뒤채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확률연산 발동]
[예측: 대상 없음. 청각 정보로 대체 판단]
시스템이 이렇게 나올 때마다 조금 허탈했다.
싸울 상대가 없으니 확률연산도 딱히 할 게 없는 거였다.
그래도 뭔가 뜨는 게 있으니 안심이 되긴 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정보긴 하지.'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번 달도 진짜 장부는 따로 빼놨습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수고했어. 가주가 죽었으니 이제 더 신경 쓸 것도 없겠네." 다른 목소리, 좀 더 거친 톤이었다.
'저게 유민석인가.'
목소리만 들어도 사람 됨됨이가 짐작이 갔다.
남의 돈을 10년 동안 빼먹은 사람 특유의, 여유롭고 느긋한 말투였다.
"그래도 도련님이 요즘 좀 이상하게 나온다는 소문이..." 낮은 목소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둔재가 뭘 하겠어. 무재도 없는 애야. 걱정 말고 다음 달도 그대로 500량으로 올려."
확정이었다.
장부가 두 개.
실제 장부와 보고용 장부.
10년간 반복된 숫자의 비밀이 이거였다.
'무재도 없다는 얘기, 오늘로 마지막이길 바란다.'
박우현이 내 옆에서 숨을 죽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노인의 눈에 분노가 차오르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쥔 주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 그가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네요." 나는 조용히 답했다.
증거만 있으면 됐다.
장부 두 개, 그리고 방금 그 대화.
이제 필요한 건 실물 증거였다.
말만으로는 소용없었다.
장로들 앞에서 "제가 창문 밖에서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좋게 봐줘야 정신병자, 나쁘게 보면 도련님이 관리인을 모함한다는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나는 창문 틈으로 안을 살폈다.
방 안 탁자 위에 두 개의 장부책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하나는 표지가 낡았고, 하나는 새것 같았다.
'저게 진짜 장부겠지.'
낡은 쪽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새 장부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가짜니까 깨끗할 수밖에 없다.
10년 동안 손댈 일 없던 새 장부가 낡아버릴 리는 없으니까.
[확률연산 발동]
[예측: 실내 인원 2명, 문 위치와 이동 경로 계산]
방 안에는 유민석과 부하로 보이는 남자 하나뿐이었다.
지금 들어가서 뺏을 수는 없었다.
힘으로는 절대 안 될 몸이니까.
검을 든 적을 상대하는 것과 술 취한 관리인 하나 상대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는데, 하필 이 몸은 후자에도 불리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
"우현 어른, 여기 뒷문 자물쇠 상태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조용히 물었다.
박우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문을 살폈다.
쇠를 몇 번 흔들어보고, 손끝으로 문틈도 짚어봤다.
"...낡아서 곧 부서질 것 같습니다."
"좋네요."
나는 미소 지었다.
오늘 당장 뺏을 필요는 없었다.
밤이 깊으면, 이 건물은 텅 빌 시간이 온다.
점소이들도 퇴근하고, 손님도 다 빠지고, 유민석마저 술기운에 곤히 잠들 시간.
그때 다시 오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밤은 길고, 나는 잠도 잘 안 오는 몸이니까.'
우리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골목을 벗어나며 박우현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 숨소리에 10년치의 분함이 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도련님... 정말 10년 동안 그런 짓을..."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우현 어른, 우현 어른이 아버님께 신뢰받던 이유가 뭐였습니까." 나는 걸으며 물었다.
"...충심이었지요." 박우현이 답했다.
"그거면 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도와주세요."
박우현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이 조금 전 분노에서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신뢰, 그리고 조금의 놀람.
"도련님은... 정말 변하셨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좋은 쪽으로겠죠?" 나는 웃으며 물었다.
박우현도 처음으로 웃었다.
"예, 아마도요."
그 웃음을 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10년 묵은 충신 하나 얻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물론 쉬운 건 아니었다.
그냥 이 노인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지가 느껴져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오늘 밤늦게 다시 복만루로 가서 진짜 장부를 확보한다.
그 장부를 가지고 가문 장로들 앞에서 유민석을 축출한다.
그다음 복만루를 직접 관리하며 가문의 재정을 다시 세운다.
계단식으로 쌓인 계획이 머릿속에서 딱딱 맞아떨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큰 판을 앞두고 패를 짜는 그 긴장감.
전생에도 그랬다.
정보 하나, 패 하나 쥐고 상대가 모르는 그림을 그릴 때, 딱 이 기분이었다.
'이번엔 목숨 안 걸고 하는 판이라 더 좋네.'
그런데 골목 끝에서, 낯선 그림자 하나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옷차림이 심상치 않게 고급스러웠다.
평범한 골목에 서 있기엔 옷 한 벌 값이 이 동네 한 달 밥값보다 비싸 보였다.
박우현이 그를 알아본 듯 낮게 속삭였다.
"도련님, 저 사람은... 마씨 가문 사람입니다."
마씨 가문.
마준혁이라는 이름이 다시 머릿속에서 울렸다.
'왜 하필 지금, 여기서.'
남자는 우리를 잠시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의 시선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 아니라, 뭔가를 이미 다 알고 확인하러 나온 눈이었다.
'왜 마씨 가문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복만루 근처에, 이 밤에.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한 등장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판이 이미 내가 알지 못하는 곳까지 넓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유민석 하나로 끝나는 판이 아닌 것 같은데.'
박우현의 얼굴에도 같은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까지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있었다.
오늘 밤, 원래 계획대로 복만루에 다시 갈 수 있을지, 그것부터 다시 계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