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노름꾼의 검로

4화

시험이 끝난 지 사흘 만에, 가문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둔재 도련님이 임재현 도련님을 이겼다더라." "그것도 내공 하나 안 쓰고." 하인들이 복도에서 수다를 떨다 나를 보고 입을 다무는 게 벌써 서너 번째였다. 한 번은 세탁장 앞을 지나다가 빨래를 널던 하녀 둘이 나를 보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는 걸 봤다. 한 명이 황급히 인사를 하고, 다른 한 명은 그 와중에도 곁눈질로 나를 훑었다. '저건 뭐, 관상 보는 건가.' 또 한 번은 마당을 지나다가 무술 교관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확률연산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글쓴이도 몰라.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됐다니까." '글쓴이라니, 나를 소설 속 인물 취급하는 건가.' 아니, 이 세계 사람들 입장에선 나도 뭐, 이상한 캐릭터긴 하지. '이거 참, 유명세라는 게 이렇게 부담스럽구나.' 전생에서 도박판 유명세는 다르게 다가왔었다. 그건 인정이었지,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저 사람이 그 판을 뒤집은 사람이야"라며 어깨를 툭 치고 술을 사줬다. 지금은 다들 나를 보면서 뭔가를 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고 있다는 건, 아직 내가 어느 패인지 확신을 못했다는 뜻이지.' 그게 오히려 편했다. 패를 다 보여주면 게임이 재미없어지는 법이니까. 박우현이 아침상을 들고 오며 말했다. "도련님, 오늘 조회에서 장로들이 도련님 얘기를 하더군요." "좋은 얘기였겠지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반은 좋고 반은 걱정이었습니다." 박우현이 신중하게 답했다. "가주님이 안 계신 지금, 도련님이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면..." "누군가는 불편해지겠죠." 나는 말을 이어받았다. 박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셋째 장로님 쪽 반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박우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이 임재현 도련님을 이긴 게, 우연이 아니라 뭔가 숨겨진 힘 때문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나는 숟가락을 들며 답했다. '숨겨진 힘, 확률연산 맞죠.' 박우현이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넘겼다. '저 반응, 진짜 뭐라도 눈치챈 건가.' 확률연산이나 상태창을 대놓고 얘기할 순 없으니, 나는 그냥 국을 떠먹는 걸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날 오후, 임서윤이 다시 내 방을 찾아왔다. 지난번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 그 웃음이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웠다. 손에는 못 보던 과자 상자까지 들고 있었다. '선물 공세라니, 패를 완전히 바꿨네.' "준서 도련님, 며칠 사이 많이 달라지셨네요." 임서윤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번엔 애물단지라며.' "그런가요."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날 시험, 정말 놀랐어요. 재현 오라버니도 만만치 않은 실력인데." 임서윤이 손끝으로 찻잔을 만지며 말했다. 계산이 뻔히 보였다. 지난번엔 애물단지, 이번엔 도련님. 패가 바뀌었으니 태도도 바뀐 거였다. "제가 만든 떡이에요. 드셔보실래요?" 임서윤이 과자 상자를 슬쩍 밀며 말했다. '직접 만들었다는 말도 안 믿기지만, 일단 받고 보자.'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말하며, 속으로는 이 떡이 독은 아닐지 슬쩍 의심했다. 전생 도박판에서도 갑자기 잘해주는 사람이 제일 위험했었다. "약혼은 가주님 계실 때 얘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나는 일부러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임서윤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건... 도련님 상태가 안 좋으실 때라 걱정돼서 그랬죠." 그녀가 억지로 웃으며 둘러댔다. '거짓말도 참 성실하게 하네.' "그럼 지금은 상태가 좋아졌으니, 약혼 얘기가 다시 나오는 건가요?" 나는 슬쩍 더 파고들었다. 임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거 봐, 저거.'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특유의 눈동자 흔들림, 도박판에서 수백 번은 본 패턴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재미가 떨어진다. 어차피 이 여자는 조만간 다른 패를 만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마씨 가문 도련이라는 이름이 원 소유자의 기억 어딘가에 스쳤다. 마준혁. 지금은 그저 낯익은 이름 정도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판이 커지면, 그때 다시 볼 이름이었다. 임서윤이 별 소득 없이 방을 나가자, 나는 그녀가 놓고 간 떡 상자를 물끄러미 봤다. '일단 먹진 말고.' 박우현에게 넘기기로 했다. "우현 어른, 가문 재정 상태가 어떻습니까." 박우현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지 않습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이 계실 땐 그럭저럭 버텼는데, 지금은..." "복만루는 어떻습니까." 원 소유자의 기억 속에 복만루라는 이름이 있었다. 가문 소유의 주점, 동운시에서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있는. 박우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복만루는... 외숙부님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외숙부. 유민석. 원 소유자의 기억이 그 이름 위로 흐릿한 그림자를 씌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신뢰해서 맡긴 사람. "관리 상태는요?" 나는 다시 물었다. "매달 500량 정도 수익이 난다고 보고받고 있습니다." 박우현이 답했다. 숫자. 숫자가 나오면 나는 편해진다. 계산할 수 있으니까. "우현 어른, 복만루 규모가 어느 정도입니까." "동운시 남문 대로변 3층짜리 건물입니다. 하루 손님이 백 명은 족히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객단가는 얼마쯤 됩니까." 나는 계속 물었다. 박우현이 잠시 당황했다. "객, 단가라니요?"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얼마씩 쓰고 가는지 말입니다." "그, 그건...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박우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여긴 회계 개념이 아직 없으니까.' 나는 속으로 대충 계산을 굴렸다. 백 명이 하루에 최소 은자 서너 냥씩만 쓴다고 쳐도, 하루 매출이 삼사백 냥은 나와야 정상이었다. 한 달이면 만 냥 단위. 그런데 순수익이 500량이라니. '백 명 넘는 손님, 3층 건물, 남문 대로변인데 월 수익 500량.' 뭔가 계산이 맞지 않았다. 전생에서 나는 도박장 회계도 여러 번 뒤집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숫자를 속일 때 나오는 패턴이 있다. 너무 딱 떨어지는 숫자, 매달 변동이 거의 없는 숫자. "그 500량이라는 숫자, 몇 년째 그대로입니까." 박우현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제 기억으로는 10년 가까이 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10년. 같은 규모의 장사에서 10년 내내 수익이 그대로라는 건, 매출이 아니라 조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생에서 이런 숫자를 봤다면, 나는 바로 판을 접고 다른 자리로 옮겼을 거다. 왜냐면 이런 자리는 백 프로 누군가 딜러 몰래 패를 접었다는 뜻이니까. [정보: 유민석, 복만루 관리인, 강태을의 처남] 원 소유자의 기억을 다시 뒤져봤다. 유민석이라는 이름 뒤에 딱히 나쁜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명절마다 선물을 들고 오는 좋은 외숙부의 이미지였다. 설날엔 곶감을, 추석엔 옷감을 들고 왔다는 기억까지 선명했다. 그게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10년이나 유지되려면, 뭔가는 계속 감춰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외숙부 코스프레도 10년이면 프로급이지.' "우현 어른, 저 복만루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요."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박우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도련님이 직접...?" "장부를 좀 보고 싶어서요." "외숙부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거겠지.' "제가 그냥 손님으로 가는 건데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나는 웃으며 답했다. "손님으로 가신다고 해도, 그 자리 사람들이 도련님을 못 알아볼 리가..." "그럼 몰래 가야겠네요." 박우현의 얼굴에 걱정과 흥미가 반씩 섞였다. "몰래, 라고 하시면..." "복장 좀 빌려주십시오. 평범한 상인처럼 보이는 걸로." 박우현이 잠시 나를 빤히 봤다. 지난 3년간 코피만 흘리던 도련님이 갑자기 회계 감사를 하겠다고 나서다니,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가 결국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다만 도련님,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숙부님은... 겉보기와 다른 분이실 수도 있습니다." '겉보기랑 다른 사람, 이 세계에도 그런 사람이 넘쳐나는구나.' 그날 밤,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근력 등급: 하급 → 하급 상위] [확률연산: Lv.1 → Lv.2] 조금씩이지만 오르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한 상승이었다. '적금 붓는 기분이네.' [가문 내 인지도: 中] 인지도가 中이라니. 보름 전만 해도 존재감이 마이너스였는데. '세상 참 재밌게 굴러가네.' 나는 손가락으로 상태창의 다른 항목들도 쭉 훑어봤다. [체력], [내공 보유량], [지능]... 다 그대로였다. 확률연산만 유독 눈에 띄게 올라 있었다. '이게 내 무기니까 당연한 거겠지.' 창밖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숨기려는 발소리였다. 나는 창을 열지 않고 그냥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내 방 창문 아래를 지나 다시 뒤편으로 사라졌다. '저 방향은 뒤채, 외숙부 처소 쪽인데.' 임재현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확률연산으로도 이건 예측이 안 됐다. 대상이 안 보이니까. 확률연산은 눈에 보이는 변수를 계산하는 능력이지, 벽 너머 사람까지 꿰뚫어 보는 건 아니었다. '초능력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발소리는 곧 멀어졌다. 나는 다시 눕지 않고 앉은 채로 밤을 보냈다. 복만루의 숫자가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갔다. 500량, 10년, 3층 건물, 백 명의 손님. 어떤 조합으로도 그 숫자는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전생에서 이런 걸 하나 발견하면 나는 밤새 잠도 안 자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금은 계산기 대신 확률연산이 있으니, 훨씬 편한 셈이었다. 내일은 복만루로 가야 했다. 장부를 봐야, 이 판의 진짜 패가 보일 거였다. 그리고... 그 패 안에 유민석이라는 이름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할 때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