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서툰 손끝, 그대의 열

1화

퇴근길이었다. 한 손엔 쌀 한 포대를 안고, 다른 손으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던 참이었다. 8시 반, 야근 수당도 못 받는 야근을 마친 금요일 밤이었다. 마트에서 산 쌀은 무거웠고, 어깨는 하루종일 앉아있었던 탓에 뻐근했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순간, 발밑에서 빛이 솟았다. 눈부신 청색광이었다.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서울에 없었다. 발밑엔 낯선 문양이 새겨진 원형 마법진이 있었다. 처음 보는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푸른빛이 잔불처럼 남아 있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바닥은 대리석처럼 매끈했고, 차가웠다. 주변엔 사람들이 있었다. 갑옷을 입은 이들, 로브를 걸친 이들. 적어도 서른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낮고 굵은 목소리들이 겹쳐 울렸다. 홀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뭐? 나는 여전히 쌀 포대를 안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비닐포장의 감촉이 유일하게 현실감 있는 것이었다. 차갑고, 조금 미끄럽고, 익숙한 무게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로 쌓은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향 냄새가 은은하게 도는 넓은 홀. 게임에서나 봤을 법한 풍경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붉고 파랗게 부서지며 바닥에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이거 뭐야.' '몰카인가.' '아니 몰카를 이렇게까지 준비하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어느 것도 그럴듯하지 않았다. '꿈이면 좋겠는데.' 뺨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꿈이 아니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쌀 포대를 고쳐 안았다. 이 상황에서도 쌀을 놓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쌀 포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주황빛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밝고 선명한 색이었다. 노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색이었다. 그 아래로 파란 눈동자가 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은색 경갑을 두르고 파란 망토를 걸친 남자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잘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엔 어딘가 순한 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저는 이하람입니다." 그가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말했다. 존댓말이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 큰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다정했다. "성녀님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홀 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침묵이었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지.' '거짓말을 해야 하나. 아니 뭘 근거로 거짓말을 해.'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겠지.' "한서아……인데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낯선 곳에서 내 이름을 말하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대답이 튀어나온 순간,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던 눈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하람님?" 주변에서 누군가 외쳤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쌀 포대를 놓쳤다. 바닥에 쌀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후드득, 쌀알이 대리석 위로 흩어지는 소리만이 그 순간 유일하게 평범한 소리였다. 이하람이라는 남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팔에 붉은 발진이 순식간에 번지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마치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이거…… 왜 이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를 악문 채였다. "성녀님." 다른 목소리가 옆에서 났다. 검은 머리를 가운데로 곱게 가른 남자였다. 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얼굴은 젊어 보였지만 눈빛은 훨씬 더 나이든 사람 같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이미 몇 번쯤 겪어본 사람처럼, 당황보다는 침착함이 먼저 드러났다. "저는 서윤재입니다. 지금 상황을 설명드릴 시간이 없어 죄송하지만, 우선 저 사람을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요? 저는 아무것도……" "성녀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서윤재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 밑에 감춰진 조급함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자꾸 이하람 쪽으로 흘렀다. "저는 능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하람이 옆으로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다. 갑옷이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는 비명 같은 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발밑엔 쏟아진 쌀알이 흩어져 있었다. 그 위로, 이하람의 팔에서 뻗어나간 붉은 발진이 목까지 번지는 게 보였다.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저 사람 이대로 죽는 거 아니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근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변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쏟아졌다. 기대와 절박함이 섞인 눈빛들이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성녀님, 부디……!" 그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이름 뒤에 붙은 '성녀'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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