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성의 회랑을 걸으며 서윤재의 설명을 다시 곱씹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어제 그 순간, 발진이 옅어졌다던 그 순간. 그게 정말 내 힘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우연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힘을 썼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그냥 손을 얹고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녀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람 목숨이 걸린 일에 휘말리고 있었다.
회랑 끝에서 이하람과 마주쳤다.
그는 어젯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얼굴에 핏기가 돌았고, 걸음도 안정적이었다.
주황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어제만 해도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던 낯빛이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의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훨씬 나아졌어요."
그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앳돼 보였다.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맑아서, 나는 순간 어제의 그 발작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어제 성녀님이 곁에 계셔주신 것 같은데,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인사는 됐어요. 그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주는 원래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이하람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웃음이 걷힌 얼굴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1년 전, 마왕군과의 전투 중에 걸렸어요. 정확히는 마왕군의 부관과 싸운 직후였습니다. 그 뒤로 발작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부관이요?"
"이름은 카젤이라고 불립니다. 그 사람이 제게 뭔가를 걸었다는 것 같은데, 저희 신관들도 정확한 원리를 모릅니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카젤. 저주를 건 사람.'
"발작 주기는 얼마나 되나요?"
"거의 매일 입니다."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짧아지고 있다는 건 나빠지고 있다는 거잖아.'
이하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그때 서윤재가 다가왔다. 손에 낡은 책을 들고 있었다.
가죽 표지는 색이 다 빠져 거의 회색에 가까웠고, 페이지 끝은 곳곳이 삭아서 부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성녀님, 이걸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펼치자 오래된 그림이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형상이 붉은 마법진 위에서 누군가에게 손을 뻗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 인물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검은 선들이 상대의 몸을 그물처럼 휘감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건 고대 저주 마법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녀의 힘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전언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다만……"
서윤재가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마법은 대상과 시전자 사이의 감정적 유대가 강할수록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두 번, 세 번.
'감정적 유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하람이 옆에서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성녀님이 하람님에게 마음을 쓰실수록, 치유의 힘이 발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회랑을 지나던 시녀 하나가 우리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다가 슬쩍 걸음을 빨리해 지나갔다.
나는 이하람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귀가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뭐야, 이 상황.'
'갑자기 왜 이렇게 부끄러워.'
'나만 이런 거 아니지?'
서윤재는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자료 중 가장 근거 있는 가설입니다."
"근거가 이거 하나뿐이라는 거예요?"
"고대 문헌 특성상 다른 사례를 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성녀의 힘이 유독 특정 인물에게 강하게 반응했다는 기록은 이 책 말고도 두 곳에서 더 발견됩니다."
서윤재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보를 나열하는 그 말투가 오히려 상황을 더 실감 나게 만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럼 나는 저 사람이랑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하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꾸 손끝을 매만졌다.
"저기, 성녀님."
"네?"
"그럼 앞으로도…… 자주 뵈어야 한다는 거네요."
"그, 그런가 봐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도 어색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하람도 따라 웃었다. 둘 다 이유 없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윤재만이 그 옆에서 책을 정리하며 조용히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때 회랑 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여러 개 겹쳐서 들려왔고, 그 사이로 다급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갑옷 자락이 어지럽게 흔들렸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신관님! 성녀님!"
그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국경 쪽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마왕군의 부관 카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순간 회랑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하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도 앳돼 보이던 얼굴에서 핏기가 다시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옷깃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카젤.
저주를 건 사람. 그리고 이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사람.
'설마 발작이 짧아지고 있는 게…….'
'저 사람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 거야?'
서윤재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책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회랑을 채운 침묵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