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약자님, 언니가 더 좋으세요?

3화

내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은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머리는 저 혼자 계산을 시작했다. '후계자가 서인 언니로 바뀐다면, 앞으로 가문의 방향은 어떻게 될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났다. 이건 습관이었다. 세하령의 장부를 십 년 넘게 만져온 손은, 위기 앞에서 저절로 숫자를 찾았다. 서인 언니는 영지 경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관심도 없었다. 언니가 배운 건 예법, 화술, 사교. 그것들도 물론 필요하지만, 곳간이 비어 있으면 예법으로 밥을 지을 수는 없었다. 창밖으로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 정원도 결국 세하령의 세수로 관리되는 것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데도 돈이 든다. 그런 걸 서인 언니가 알까. '모를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언니는 정원사가 왜 매달 예산을 받아 가는지조차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준혁 님 가문은 어떤가.' 이준혁의 가문, 이씨 자작가는 수도 인근에 작은 영지를 갖고 있었다.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소문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년 겨울, 그 가문의 소작농들이 조세를 낮춰달라 청원을 넣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청원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몇몇 소작농이 땅을 버리고 떠났다는 뒷소문도 함께였다. '가문의 재정을 합치면, 오히려 우리 쪽 부담이 늘어날 수도 있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숫자를 세어보았다. 이씨 자작가의 세수 규모, 부채 추정치, 소작농 이탈률까지. 세하령의 곳간에서 매년 얼마가 빠져나가 그쪽 살림을 메워야 할지 대략의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그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야 스스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아직도 이런 걸 계산하고 있지.' 이제 나는 이 계산을 해줄 이유가 없었다. 후계자도 아니고, 혼약자도 없었다. 그런데도 손은 저절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습관이란 참 무섭구나.' 밤이 깊어질수록 생각은 더 어두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만약 서인 언니가 후계자가 되고, 이 상태로 몇 년이 지난다면.' 세하령의 세수 관리 체계는 내가 만든 것이었다. 수로 정비 일정, 흉작에 대비한 비축량 계산, 소작농들과의 조세 협상까지, 그 모든 게 내 머릿속과 장부 속에 있었다. 나 없이 그것이 유지될 리 없었다. 몇 달만 방치돼도 흉작에 대비한 곳간은 비게 되고, 수로 정비는 뒤로 밀리고, 소작농들의 불만은 쌓일 것이다. 그리고 불만은 언젠가 조세 거부로, 조세 거부는 곳간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 순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차엔 티가 안 날 것이다. 이 년 차엔 소문이 돌기 시작하겠지. 삼 년 안에 가문의 재정이 흔들릴 것이다.' 나는 그 결론에 도달하고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한다고 해서 누가 들어줄까. 방금 전 응접실에서 본 얼굴들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시선 회피, 어머니의 사람들 보는 눈이라는 변명, 서인 언니의 미안하다는 사과. 그 어느 것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은 걸로 보일 게 뻔했다. '그림이 너무 선명해서 웃음도 안 나온다.' 나는 창틀에 팔을 괴고 턱을 얹었다. '혼자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건 외로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결론이기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지난 십 년간의 세하령 장부 사본이 있었다. 원본은 후작가 서고에 있지만, 사본은 늘 내가 따로 보관했다. 습관 같은 것이었다. 언제 누가 원본을 잃어버릴지, 혹은 고쳐 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사본을 손끝으로 넘겨보았다. 겨울마다 눈이 많이 내린 해의 수로 보수 비용, 흉작이 든 해의 곳간 방출량, 소작농 열두 가구가 새로 정착한 해의 조세 조정 내역까지, 종이마다 숫자가 빽빽했다. 이 숫자들을 채우기 위해 밤을 새운 날들이 얼마였던가. '이걸 갖고 나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스스로도 놀랐다. '나가다니. 어디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하령을, 후작가를 떠난다는 상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숫자를 채우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게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혼약도 깨졌고, 후계자 자리도 없다. 나를 여기 붙잡아둘 게 뭐가 있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평소라면 나는 뭐든 계산해서 답을 냈을 텐데. 창밖에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었다. 손에 든 장부 사본은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안 주무셨어요?" 명희였다. 내가 세하령에서 데려온 시종. 후작가에서 유일하게 나를 아가씨라 부르며 걱정해주는 사람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명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따뜻한 차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명희의 눈이 내 손에 들린 장부 사본을 잠깐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희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날 밤 유일하게 편안했던 순간이었다. 명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나는 장부 사본을 서랍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뭔데." 명희는 쟁반을 든 손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어젯밤에, 응접실 밖에서 좀 들었는데요."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들었다니. 뭘 들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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