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궁중 연회 날, 왕궁의 대연회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져 내렸고, 악단의 선율 아래로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초청받았지만,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시선은 온통 서인 언니에게 쏠려 있었다.
파혼당한 전 왕자비 후보. 그 소문의 주인공을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쟤가 그 강씨 후작가 큰딸이라며."
"저런 자리에 뭘 하러 나온 거야, 얼굴에 철판을 깐 건지."
"그러게, 나였으면 못 나왔을 텐데."
서인 언니는 그 시선들을 견디며 우아하게 걸었다. 걸음걸이 하나, 고개를 드는 각도 하나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나는 언니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십 년 넘게 이 집안 사람들을 지켜본 눈이었다.
'저 자리, 나였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연회장 안쪽, 이현 왕자가 서 있었다. 금사 자수가 놓인 예복을 입고, 주변 귀족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 곁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자작가 문양을 단 여인이었다.
나은서. 최근 사교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자작 영애였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 자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제 막 만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왕자가 그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 관계가 이미 오래된 거라면.'
소름이 돋았다. 만약 왕자가 나은서 영애와 진작부터 만나고 있었다면, 서인 언니와의 혼약 파기는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혼약 자체가 처음부터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뜻이 된다.
'설마, 언니는 처음부터 방패였던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속이 뒤틀렸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 부정하려 했지만, 눈앞의 두 사람이 잡은 손은 그 부정을 계속 무너뜨렸다.
그때였다.
이현 왕자가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악단의 연주마저 서서히 멎었다.
"저는 나은서 영애와 정식으로 혼약을 맺기로 했습니다."
순간 곳곳에서 놀란 숨소리가 터졌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여인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짓을 주고받는 귀족들. 나는 그 반응들 사이에서 서인 언니의 얼굴을 보았다.
서인 언니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왕자는 말을 이었다.
"이전 강서인 영애와의 혼약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마음이 없었던 관계였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사과의 자리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머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왕자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혼약 파기를 정중히 마무리 지을 거라 믿었다. 이건 그 기대를 짓밟는, 공개적인 모욕이었다.
서인 언니가 몸을 떨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언니에게 쏠렸다.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들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대놓고…"
"그럼 그동안 강씨 영애는 뭐였던 거야."
"쓸모없어지니 버린 거지 뭐."
작게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칼처럼 언니의 등을 찔렀다.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왕족 앞에서 함부로 나설 수 없다는 걸 아는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인 언니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다시 굳게 다물어졌다.
나는 그 순간, 이 자리에서 언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체면을 걱정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다른 친척들은 애초에 이 자리에 언니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다들 이 광경을 구경하러 온 것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언니는 이 자리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내 발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언니 옆으로 다가가 팔을 잡았다. 언니의 팔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언니, 이쪽으로."
"서윤아…"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걸 언니도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나가는 게 먼저야."
나는 언니의 등을 감싸 안듯 몸을 돌렸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언니의 얼굴을 가리려 애썼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나에게 쏠렸다. 평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나였는데.
"어, 저 아이는 누구지?"
"둘째 딸 아니야? 존재감이 없어서 몰랐네."
그 시선들 사이로, 나은서 영애의 눈이 나를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있었다. 마치 내가 이 자리에 나선 것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혹은 그것이 자신의 계획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언니의 다리가 휘청였고, 나는 그 무게를 어깨로 받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언니를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로 왕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강씨 후작가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을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고, 연회장 전체에 퍼질 만큼 크기도 계산되어 있었다. 마치 이 자리의 모두에게 각인시키려는 듯한 발언이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왕자와 나은서 영애가 나란히 서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모습, 그리고 그 뒤로 무너져 내리는 우리 가문의 자리.
그 한마디가, 앞으로 이 가문에 닥칠 일들의 서막이라는 걸, 나는 그 순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 서막이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