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능력, 내가 베낀다

1화

서울 한복판, 광화문 사거리. 정오의 햇살이 아스팔트를 데우고 있었다. 빌딩 유리창마다 그 햇빛이 부서져 반사되었다. 경적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점심을 사러 나온 직장인들의 웅성거림. 평범한 소음이었다. 안호는 박물관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목에 걸린 사원증이 셔츠 위에서 흔들렸다. 점심시간 십오 분. 그게 그가 쓸 수 있는 전부였다. 전시실 유리 진열장을 하루 종일 닦아 온 손끝이 아직도 알코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빨리 삼각김밥이라도 하나 사서 씹어야 오후를 버틸 수 있었다. 그때 하늘이 붉게 일그러졌다. 쾅! 건너편 빌딩 유리창이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유리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반짝거리는 조각들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순간적으로 눈이 부실 만큼 빛났다. 그 아름다움과 어울리지 않게, 파편은 지면에 닿는 순간 사람의 살을 찢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누군가 안호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또 누군가는 넘어진 채로 기어서 도망쳤다. 안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발이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저게.' 빌딩 옥상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사람의 형체였다. 그러나 몸 전체가 타오르고 있었다. 피부가 아니라 불꽃 그 자체로 이루어진 존재. 윤곽만 사람 같았고, 그 안은 전부 이글거리는 화염이었다. 두 눈만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색은 불의 색과 어울리지 않게 차가웠다. 화염신. 그 이름을 몰랐지만, 안호는 직감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그 경계 바깥에 있는 무언가였다. 화염신이 팔을 휘저었다. 화르륵- 불기둥이 도로를 따라 번져 나갔다. 아스팔트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검게 부풀어 올랐다. 차량들이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었다. 경적이 끊기고, 대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철판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겹쳐 들렸다. 누군가는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는 그냥 목이 터지도록 소리만 질렀다. 안호는 뒷걸음질쳤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이 엉켰다. 쿵. 등 뒤로 넘어졌다. 엉덩이와 등에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뜨거웠다. 데워진 바닥이 아니라, 화재의 열기가 공기를 통해 밀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건물 하나가 기울었다. 오 층 건물이 화염에 뼈대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근이 비틀리는 소리, 콘크리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안호의 바로 위로.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크게 뜬 채로, 떨어지는 콘크리트의 표면에 난 균열까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죽는다.' 그 생각만이 뇌를 가득 채웠다. 죽는다, 여기서, 이렇게. 박물관 유니폼을 입은 채로, 삼각김밥도 못 먹고, 이렇게. 그 찰나, 눈앞에 낯선 빛이 떠올랐다. 【초신 보조 시스템이 강제 기동됩니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문장이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동시에, 눈으로 보는 세상과 겹쳐서 존재했다. 안호는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고객님의 생존 확률이 3% 미만으로 판정되었습니다.】 【비상 프로토콜에 따라 백 미터 범위 내 능력 하나를 무상 복제합니다.】 무상, 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선명하게 박혔다.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저 문장은 마트 전단지 같은 어조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깨가 들리고, 팔꿈치가 펴졌다. 손끝에서 열기가 솟았다. 뜨거운 게 아니라, 뜨거움 그 자체가 손바닥에 고인 느낌이었다. 피부가 익는 통증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바닥 안에 작은 태양 하나가 눌러앉은 듯한, 낯선 압력이었다. 안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콰르릉! 손끝에서 뻗어 나간 불꽃이 무너지는 콘크리트를 정면으로 밀어냈다. 먼지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귓속이 먹먹해졌다. 이명이 길게 울리며 세상의 소리가 한 겹 뒤로 밀려났다. 안호는 팔을 든 채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자신의 손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긴 것처럼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그의 발 바로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는 그의 발끝에서 채 반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있었다. 그 잔해 위로,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불길이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금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화상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저 손에서 불이 나갔다. 화염신이 옥상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사람을 인식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존재처럼. 새파란 눈이 안호를 향했다.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저게 나를 봤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화염신이 팔을 뻗었다. 손끝에서 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려는 순간, 도로 저편에서 굉음이 터졌다. 쾅!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화염신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발이 닿는 순간 화염신의 몸에서 불꽃 파편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순식간에 화염신이 옥상 밖으로 튕겨 날아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그 불타는 형체가 사라지며, 굉음이 도플러처럼 멀어졌다. 안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몸을 일으켜 뒷골목으로 내달렸다. 다리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무거웠다. 몇 걸음 못 가 발목이 꺾일 뻔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속도를 냈다. 뒤에서 또다시 폭음이 들렸다. 이번엔 더 멀리서, 그러나 여전히 지면을 흔들 만큼 크게. 뛰는 내내 머릿속에서 알림이 계속 떠올랐다. 【복제 능력: 화염 방출 (기초형)】 【남은 사용 가능 시간: 0초】 【재사용 대기시간이 발생합니다.】 숫자들이 시야 한 귀퉁이에 뜬 채로 흔들렸다. 지금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안호는 좁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폐가 쪼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떨림이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올라왔다. 방금 그 손에서 불이 나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주저앉았다. 차가운 벽돌 표면이 셔츠를 뚫고 등에 닿았다. 젖은 벽돌의 냄새와 매캐한 화약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아까 진열장을 닦던 알코올 냄새가 손끝에서 올라왔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유리 진열장을 닦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지는 골목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세상이 통째로 뒤집힌 것 같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였다.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의 사이렌이 겹쳐서 도로 전체를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렌 소리를 뚫고,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알림이 떠올랐다.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생존에 성공하셨습니다.】 【다만 안내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안호는 숨을 몰아쉬며 그 문장을 노려보았다. '안내드릴 사항이라니.' 방금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저 시스템은 상담원처럼 말하고 있었다. 친절하다 못해 뒤틀린 어조였다. "이게 다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누구에게 묻는 건지도 모른 채였다. 다음 문장이 뜨기까지,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고객님의 정신력이 회복되는 즉시 안내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려 주십시오, 라는 말이 유독 낯설게 들렸다. 방금 건물 하나가 무너졌고, 사람이 불에 타 죽었을 텐데. 시스템은 마치 상담 대기열에 올려놓듯 그를 세워두고 있었다. 안호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손끝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한 번. 두 번. 그래도 심장은 여전히 갈비뼈를 두드리고 있었다. 골목 저편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느리지만 분명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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