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박범수의 메시지는 그날 밤까지 계속됐다.
[박범수] 답장 좀 해. 이거 장난 아니야.
[박범수] 딥웹 쪽에서 그러는데, 이런 각성자들이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나타났대.
[박범수] 정부에서 숨기고 있는 것도 있는 것 같고.
안호는 야근 중인 전시실 구석에서, 진열장 유리를 닦으며 화면을 흘겨보았다.
손에 든 걸레에서 세제 냄새가 옅게 풍겼다.
형광등 불빛이 유리 위로 미끄러졌다.
닦아도 닦아도, 손자국은 계속 남았다.
답을 하고 싶었지만, 뭘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 속 대화창이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숫자만 늘어나는 읽지 않은 메시지처럼, 마음속 압박도 늘어났다.
결국 짧게 썼다.
[안호] 나도 몰라. 나중에 얘기하자.
[박범수] 야, 너 그 영상 너 맞잖아. 왜 숨겨.
안호는 손을 멈췄다.
걸레가 유리 위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박범수는 원래 이런 걸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랜 친구였다. 대학 시절부터 알던.
같이 밤새 술 마시고, 같이 취업 스트레스 받던, 그런 놈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마치 취재하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안호] 지금 그거 말할 상황 아니야.
[박범수] 그럼 언제 말할 상황인데?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박범수] 나 지금 정보 모으는 채널에 있어. 너 얘기하면 도움 받을 수도 있어.
안호는 손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정보 모으는 채널이라니.'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지나갔다.
낯선 이들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두고 떠드는 장면.
[안호] 나를 거기다 팔겠다는 소리야?
[박범수] 팔겠다는 게 아니라, 서로 정보 공유하자는 거지.
[안호] 됐어.
[박범수] 뭐가 됐어. 너 지금 이상한 힘 얻은 거 맞잖아. 그거 혼자 감당 못 해.
안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낯설게 들렸다.
목구멍 안쪽이 씁쓸했다.
친구라는 단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걸레를 다시 유리에 문지르며, 안호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손목이 뻐근했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잔 탓이었다.
【각성 포인트: 12점.】
【남은 기한: 29일 14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20시간 12분.】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988점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루에 벌 수 있는 포인트가 몇 점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남은 기한이 다 지나도 채우지 못할 게 뻔했다.
안호는 진열장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때, 전시실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안호는 걸레를 멈췄다.
전시실 안이 순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정전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미묘하게 무거워졌다.
【경고: 각성 개체가 100미터 범위 내로 진입했습니다.】
【감지된 능력: 뇌전 발생, 사념 전달.】
등골이 곧게 얼어붙었다.
같은 두 존재가,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기 시작했다.
안호는 걸레를 진열장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가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바닥을 밟는 발소리마저 최대한 죽였다.
박물관 앞 광장에, 검은 긴팔 옷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뇌신과 초념신.
가로등 불빛 아래, 그들의 실루엣이 유난히 또렷했다.
그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반인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허름한 차림에, 등이 잔뜩 굽어 있었다.
뇌신이 손을 뻗자, 남자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와 뇌신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빛은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다가, 순식간에 뇌신의 손안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움직임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 같은 거리였지만, 안호는 왠지 그렇게 느꼈다.
초념신의 목소리가, 이번엔 안호의 머릿속까지 뚫고 들어왔다.
『이 근처에 우리 능력을 감지할 수 있는 게 있어.』
목소리는 마치 두개골 안쪽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안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얘기야.'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뇌신이 박물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젖히는 동작이 느리고, 여유로웠다.
그 시선이, 정확히 안호가 서 있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마치 시선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와."
낮고 짧은 한 마디가, 유리창을 넘어 안호의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목소리에 감정이라곤 실려 있지 않았다.
명령이라기보다, 사실을 통보하는 어조였다.
안호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진열장에 부딪혔다.
쿵.
유리 케이스 안, 조선시대 유물이 흔들렸다.
받침대 위 도자기가 위태롭게 기울었다가, 다시 균형을 잡았다.
안호는 숨을 참았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었다.
【재사용 대기시간: 20시간 11분 남음.】
지금 나가면, 아무 능력도 없이 저 둘과 마주해야 했다.
방금 남자 하나를 그렇게 쓰러뜨린 존재들과.
한 번의 손짓으로, 사람의 무언가를 그대로 빨아들이던 자들이었다.
무기도, 반격할 힘도 없이.
안호는 진열장 모서리를 짚었다.
손끝이 차가운 유리 표면을 미끄러졌다.
이대로 서 있는 게 맞는지, 도망쳐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재원] 안호 씨, 지금 밖에 이상한 사람들 있어요. 절대 나가지 마세요.
[이재원] 저 창고에 숨어 있어요. 같이 있어요.
화면 불빛이 어두운 전시실 안에서 유난히 밝게 빛났다.
안호는 얼른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췄다.
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진열장 뒤로 몸을 낮췄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창밖에서, 발소리가 박물관 입구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또박또박, 서두르지 않는 걸음.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안호는 숨을 죽인 채, 이재원이 있다는 창고 방향으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진열장 사이를 지날 때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등 뒤로, 정문 유리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낮고 긴 마찰음이, 텅 빈 전시실 전체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