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물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배가 고팠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뇌가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게 편의점 삼각김밥이라니, 이런 게 인생의 유머라면 신은 참 저급한 개그 감각을 가진 게 분명했다. 참치마요였나, 아니면 그 전에 먹었던 불닭마요였나. 마지막 끼니가 뭐였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와중에 뇌는 굳이 삼각김밥의 비닐 포장을 뜯는 감각까지 재현해내고 있었다. 정작 필요한 건 살아남을 방법인데, 뇌는 엉뚱한 데서 성실했다.
한강은 이미 강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다리 상판이 반쯤 잠긴 채로 흔들렸고, 가로수는 뿌리째 뽑혀 물살에 실려 갔으며, 어디선가 떠내려온 자동차 경보음이 물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울려댔다. 그 소리는 마치 세상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비명 같았는데, 정작 그 세상 안에서 죽어가는 나는 그 비명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초연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뇌가 처리할 정보량을 초과해서 멍해지는 거구나,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나는 전신주에 몸을 걸친 채로 팔에 힘이 빠져가는 걸 느끼면서도, 손끝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걸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정작 절박함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밀려왔는데, 서른두 해를 살면서 딱히 대단한 걸 이룬 것도 없이 이런 재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죽어야 한다는 게 억울하다기보다는 그냥 좀 시시했다. 대출은 아직 절반도 못 갚았고, 팀장에게 보내야 할 보고서는 초안조차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 상태로 죽으면 그 보고서는 누가 마무리하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두려움보다 먼저 찾아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이렇게 물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열두 살이었던가,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반지하 집이 통째로 잠겼고, 나는 옥상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흙탕물에 잠긴 우리 집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비만 오면 손끝이 시려오는 버릇이 생겼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버릇은 여전히 충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인생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해 전에 물에 가족을 뜯겼는데, 스무 해가 지나서는 물이 나를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으니, 이건 무슨 인과응보인지, 아니면 그냥 물이 나를 원래부터 노리고 있었던 건지.
전신주가 기우뚱, 뿌리부터 뽑히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지는 걸 느끼는 순간 나는 팔에 남은 마지막 힘을 짜내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걸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이 허공을 긁었고, 그 헛손질조차 힘이 다 빠져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물살이 나를 통째로 삼켰다.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흙빛으로 물들었고, 마지막으로 느낀 건 폐 속으로 밀려드는 물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없었어야'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물속이 아니라 마른 땅 위에 누워 있었는데, 등에 닿는 감촉이 딱딱한 흙바닥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몸 어디에도 물기가 없었다. 옷도 말라 있었고, 숨은 정상적으로 쉬어졌으며,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미묘하게 건조했고, 코끝에는 낯선 흙냄새와 함께 옅은 향료 같은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한강 물비린내와는 완전히 다른, 어딘가 이국적인 냄새였다.
'이게 뭐지.' 속으로 되뇌면서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다시 픽 쓰러졌다. 위를 보니 하늘이 이상했다. 해가 두 개였다. 정확히는 하나는 태양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작고 붉은 빛을 내는 천체였는데, 그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하늘을 보면서 나는 아, 이건 죽은 거구나, 아니면 완전히 미친 거구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다. 세 번째 가능성으로 이게 꿈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꿈이라면 이렇게 등짝이 아플 리가 없었다. 흙바닥의 돌부리가 그대로 등뼈를 찌르는 감촉은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낯선 언어가 귓가를 스쳤다. 처음엔 그저 소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소음이 점점 뜻을 갖기 시작했다. 마치 뇌 어딘가에서 자동번역기가 부팅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이자가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뚱뚱한 체형의 중년 남자가 금붙이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은 채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걸음걸이가 어찌나 요란한지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팔찌를 몇 개나 찬 거야, 저 사람 손목이 남아있는 게 신기하네.' 나는 그 와중에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목에도 두어 개, 귀에도 하나씩, 심지어 허리띠에까지 작은 금장식이 매달려 짤랑거렸다. 걸어 다니는 장신구 진열대 같았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는데, 목소리에는 위압감보다는 호기심과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입을 열려 했지만 목이 말라붙어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몇 번 헛기침을 한 뒤에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강, 도현입니다." 남자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았다. 눈빛이 상품 가치를 감정하는 상인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선이 내 얼굴에서 시작해 목, 팔, 다리까지 훑어 내려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문득 이게 노예 시장에서 물건 감별하는 눈빛이랑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도현이라. 낯선 이름이구나. 그런데 자네, 옷도 그렇고 피부도 그렇고, 이 근방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데."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나는 그대로 무너질 뻔했는데, 시종 중 한 명이 재빨리 팔을 붙잡아 지탱해 주었다. '고맙긴 한데,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감사할 정신도 없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보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넓게 트인 벌판, 그 가장자리로 낮은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성벽 위로는 낯선 문양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내가 묻자,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선월국의 남쪽 관문 근처다. 나는 상인 윤태호라고 하네. 자네는 아주 특별한 곳에서 발견되었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방금까지 내가 누워 있던 자리 주변의 흙바닥이었는데, 그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은빛으로 빛나는 문양이 반원을 그리며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양은 기하학적인 선들이 겹겹이 얽혀 있는 형태였고, 그 위로 옅은 빛이 미세하게 맥동하듯 흘렀다. 나는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특별한 곳이라니요?"
윤태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이 문양은 신족의 강림지에서만 나타나는 흔적이다. 자네가 그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자네의 몸에 신족의 혈이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신족의 혈이라니, 한강에서 익사할 뻔한 회사원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신족이라는 단어부터 이미 판타지 소설의 한 페이지를 넘어온 느낌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소설이 아니라 지금 내가 두 발로 서 있는 현실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놀란 표정을 짐짓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그, 그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윤태호는 대답 대신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종은 곧바로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그 동작이 지나치게 절도 있고 지나치게 정중해서, 나는 오히려 그 정중함 속에서 불편한 계산 같은 걸 읽어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뭔가 심상치 않은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는데, 그 직감이 맞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분간 내 저택에 머물게. 자네 신분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윤태호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순간,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붉은빛과 백색빛을 뿌리며 떠 있었고, 나는 그 낯선 광경 아래에서 문득 내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 직전의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낯선 세계가 내게 던진 첫 신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윤태호라는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호의보다 훨씬 크고 훨씬 차가운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